충형과 박하 02
“한국분이세요?’
“네. 반가워요. 저 와서 한국분 처음 뵙네요!”
“저두에요. 지금 도착하신 거예요?”
“네, 조금 전에 도착했는데, 더 걸을지 여기서 하루를 쉴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비가 꽤 와서 쉬시는 게 낫지 않으실까요? 조금 전에 확인해 보니깐 내일은 그래도 날씨가 오늘보다는 괜찮을 거 같던데.”
“네, 저도 그게 좋을 거 같네요. 여기 혹시 자리 남았나요?”
다른 사람들보다 1시간쯤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도 알베르게 규모가 작은 편이 아니어서인지 자리는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네. 아마 있을 거예요. 여기 숙소가 꽤 크더라고요.”
“고맙습니다! 저 체크인 먼저 하고 올게요!”
그렇게 그는 관리인에게 도장과 침대를 배정받아 짐을 놓고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레드와인 한 병과 컵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혹시 와인 드세요?”
“없어 못 먹죠 ㅋㅋㅋㅋㅋ”
“그럼 이거 작긴 한데 같이 드실래요?”
“저야 너무 고맙죠!”
그렇게 우린 서로의 이름을 물었다. 그의 이름은 충형이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처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행가였다. 전 세계 모든 곳을 가보진 못했지만 정말 많은 나라들을 여행했고 남미에서는 1년 가까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스페인어에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충형씨는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 마케팅회사를 다니다가 코로나로 인해 막혔던 하늘길이 다시 열리자마자 바로 퇴사를 하고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렇게 우린 숙소 안 식당으로 들어왔고 한쪽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창 했다. 그렇게 힘들었던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우린 서로의 자리로 잠을 청하러 갔다.
다음날 이른 아침 난 서둘러 길을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을 때, 충형씨가 슬금슬금 배낭과 짐들을 들고 나왔다.
“벌써 출발하시는 거예요?”
“네, 원래 조금 일찍 나가는 편이에요. 먼저 가볼게요. 가다가 또 만날 거 같은데요?”
“네 맞아요. 조심히 가시고요.”
“네, 부엔까미노!”
우린 앞으로 걸어야 할 서로의 길을 응원했고, 나는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녘에 길을 나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고 앉을 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다 나름 앉아있기에 편해 보이는 널찍한 돌에 앉아, 배낭을 옆에 내팽개치고 점심으로 때울만한 것을 주섬주섬 찾기 시작했다. 배낭 양쪽 주머니에는 항상 레드 와인 한 병과 물이 가득 차있는 1.5리터짜리 페트병 하나가 꽂혀 있었다. 나는 아침으로 먹다 남은 바게트빵을 반으로 잘라 그 안에 하몽, 햄과 치즈를 넣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목이 막힐 때마다 옆에 꽂아두었던 레드와인을 꺼내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아무도 없는 길 한쪽 편에 앉아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와인을 먹고 있으니 정말 순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꽤나 컸던 샌드위치가 한입정도 남았을 때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쏟아지는 햇볕에 눈이 부셔 그 모습이 흐릿했지만 그게 충형씨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와 진짜 빨리 오셨네요. 언제 출발하신 거예요?"
"아니에요. 먼저 가시고 얼마 안돼서 저도 출발했어요."
"그러셨구나. 그럼 점심은 드셨어요?"
"아 아직요. 안 그래도 여기 뒤쪽에 진짜 좋은 언덕이 하나 있던데 가서 같이 라면 끓여드실래요?"
"네? 라면요....? 어우 너무 좋죠.!"
안 그래도 샌드위치로는 배가 차지 않았던 터라 충현 씨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배낭에는 취사도구가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재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취사가 가능했다. 근처 언덕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사람키보다 약간 더 큰 올리브 나무들이 이미 듬성듬성 자리를 잡아놓고 있었다. 한쪽 편에는 오래되고 작은 성당건물 하나와 대리석 같은 하얀 돌로 만들어진 야외테이블과 일자 벤치들이 나란히 서로 쌍을 이루고 있었다. 화덕도 두어 개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곳은 동네 주민들이 캠핑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성해 놓은 곳 같았다. 야외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물을 끓이는 내내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 우리 둘은 바람이 움직이는 방향에 맞춰 위치를 옮겨가며 바람막이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물이 끓기 시작할 때쯤 라면을 넣었고 서로의 배낭에 있던 각종 햄들과 여행 첫날부터 아끼고 아껴왔던 통조림 참치를 꺼내 먹었다. 그렇게 완성된 라면은 한국식 수프와 스페인 햄들의 조화였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맛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선명하다.
그렇게 충형씨와 이틀을 함께 더 걷게 되었고 '로그로뇨'라는 큰 마을에 함께 도착하게 되었다. 나에게 충형씨에 대한 이미지는 올리브나무가 듬성듬성 있던 언덕 위에서 겨울의 막바지 찬 바람을 맞아가며 먹었던 뜨거운 햄 라면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로그로뇨에서 우린 헤어지게 되었다. 그는 다음날 바로 발걸음을 옮겼고 발병이 생긴 나는 하루 더 그곳에서 머물기로 하여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맞게 서로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게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여정이 끝나갈 무렵 포르투란 도시에서 우린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