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02
어느 한 마을에 도착할 때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잠시 잦아들었었던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난 서둘러 배낭에서 우의를 꺼내 입었다. 이미 오전에 입고 나서 말리지도 못한 채로 다시 꺼내 입어보니 비를 막기에는 입으나 마나 했지만, 그래도 추위를 막는 데에 있어서는 안 입는 것보다는 조금은 나은 상태였다. 안쪽까지 축축해져 버린 우의를 입고 세 시간 정도 더 걷다 보니 오늘의 목적지였던 푸엔테라이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걸음을 걷는 데에 있어 비라는 날씨는 참 좋은 점도 힘든 점도 가져다준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이렇게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길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비는 안 맞을 수 있으면 안 맞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데, 여기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비를 맞으며 길을 걸어가는 일이 낭만적인 행동이라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비를 맞아가며 걷다 보면 여러 가지 상황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무리 우의를 쓰고 걷지만 계속적으로 쏟아지는 비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순간이 오기 때문에 그때에는 입고 있는 모든 옷이 젖어간다. 옷뿐만 아니라 속옷부터 양말까지도 다 젖게 되기도 하는데, 그때에는 온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면 걷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럽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 때에 숲일 경우에는 굉장히 큰 활엽수밑에 쪼그려 앉아 담배 한 대 피우며 라이터 불을 쬐는 잠깐의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마을 근처일 경우에는 카페나 식당을 찾아 들어가 나무장작의 앞에 앉아 온기를 느끼며 따뜻한 커피 한잔이 그렇게나 맛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 작은 것들이지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방향과 크기가 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여러 책이나 tv프로그램들을 통해 들은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나 온몸으로 느끼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넘게 길을 걸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여러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리사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리사는 나보다 걷는 속도가 느린 편이었지만, 내가 마을 곳곳에서 종종 하루쯤 더 쉬기도 해서 인지 길을 걸으며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여 그동안 만난 친구들 모두는 아니었지만 나를 포함하여 8명 정도 함께 모여 서로 걸었던 길에 대한 이야기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이곳을 떠나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지내게 될 이야기를 하며 저녁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리사와의 마지막 만남인 줄 알았다. 집을 떠나온 지 두 달쯤 안되었을 때, 길을 걷는 도중에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정해놓은 포르투란 도시에 도착하여 4일 정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포르투에 도착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머물던 숙소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맥주 한잔 하기 위해서 동루이스 다리를 건너 걷고 있을 때, 익숙한 걸음걸이와 옷을 입은 사람이 내 옆을 쓱 스쳐 지나갔다. '어.. 누구지.. 리사랑 닮았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자마자 뒤로 돌아 난 그 사람을 불렀다.
"리사!"
"어? 순호!"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우린 그저 웃고만 있었다. 리사를 마지막으로 본 게 2주 전쯤 산티아고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길 바라며 작별인사를 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오는 이곳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제일 많은 점심시간에 서로의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종종 몇몇의 친구가 같이 있는 채팅방을 통해 서로의 소식을 듣긴 했지만, 지금까지 포르투에 있는지는 몰랐었다. 우린 옆에 열려있던 바 테이블에 앉아 맥주 두 잔을 시켜놓고 얘기를 이어나갔다.
난 그리 영어를 잘하진 못했지만, 리사랑 이야기를 할 때는 참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전혀 어법에 맞지 않았던 내 말을 스스로 이해하며 잘 들어주었고,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게끔 천천히 말해주었다. 또한 그녀는 독일어와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까지 완벽하게 잘하는 친구였다. 리사는 산티아고에서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나서 포르투까지 걸어왔다고 했다. 내가 걸어온 루트와 같았지만, 나는 포르투로 가기 전에 산티아고에서 피니테라라는 마을을 3일에 거쳐 다녀오느라 포르투로 가는 길에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간 친구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우리가 우연히 만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다 보니 슬슬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인 리사와 같이 밥을 먹을 때는 메뉴를 고르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날들과는 다르게 우린 근처에 있던 괜찮은 피자집을 금방 찾을 수 있었고, 그 가게 시그니처라고 하는 '마르게리따' 피자를 먹으러 갔다.
피자집을 갈 때마다 내가 주문하는 메뉴인 '마르게리따'는 토마토와 치즈, 바질만을 재료로 만든 피자였는데, 기본재료에 충실한 맛이 내 입맛에 가장 잘 맞았다. 많이 배가 고팠는지 서로 주문했던 피자를 다 먹고 나서 우린 한판을 더 시켜 반씩 나눠먹었다. 피자를 먹으면서 얘기를 하던 중 돌아가는 날이 같은 날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비행기 탑승시간 마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틀뒤 공항에서 보자는 약속과 함께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고 나서야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떠나는 날 공항에 도착해 전날 검사받은 PCR 음성확인서를 제출하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 리사한테 전화가 왔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이제야 출발해서 못 보게 될 거 같다며 무사히 잘 돌아가라는 말과 함께 서로 작별 인사를 전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공항 내 검사센터에서 코로나 검사지를 접수하고, 체크인한 후 출국장 안에 있던 한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메모장에 며칠간 겪었던 일들에 대한 글을 정리하고 있을 때 리사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헬로"
“순호! 어디야?”
“응? 나 여기 탑승 3A 쪽인데?”
“어?? 나 거기 건너편이야! 나 보여?”
“응?”
난 마시고 있던 맥주와 짐을 둔 채 카페를 나와 리사가 어디인지 찾고 있었다. 정말로 저 멀리 건너편에 리사가 있었다. 나를 알아볼 수 있게 손을 크게 흔드니, 리사는 나를 알아봤고 , 멀리 서였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잘 가! 조심하고!!!!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
“응! 순호. 너도 조심히 돌아가고. 꼭 다시 만나!”
"진심으로 고마웠어. 친구야"
여행을 하는 동안 함께 많은 이야기도 하고, 같은 목적지를 두고 많은 시간을 걷기도 하는 동안 어느샌가부터 꽤나 그녀와 가까워져 있었다. 독일인들은 모두 다 이성적이고 굉장히 철두철미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던 내게 그러한 편견을 처참하게 부숴버린 좋은 사람이었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는 사람과 헤어질 때의 감정은 아쉬운 마음 하나였다. 사람과 헤어질 때면 그 순간이 너무나 슬펐고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리사와의 헤어질 때의 감정은 오히려 기분 좋은 헤어짐이었다. 모든 감정들이 그리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정도였다. 끊길 듯 말 듯 계속 이어졌던 친구와의 인연을 통해 삶의 아름다운 한 부분을 내게 말해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누군가와의 이별이라는 건, 그 사람과의 시간이 다 되어서 헤어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고, 다시 그 사람과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리사와의 우연한 만남들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