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에서 그녀가 내게로 걸어오고 있다.
사뿐사뿐 내게로 오고 있다.
아직 2월의 삭풍은 한 겨울의 그것 마냥 차갑고 매서워 눈을 제대로 뜰 수 조차 없다.
그 차가운 바람 때문에 내가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걸음걸이로 보아 그녀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내가 알고 있다.
지금껏 내가 보아온 그녀의 걸음걸이는 늘 단아하고 예뻤다.
그녀의 걸음은 초겨울 이제 막 얼기 시작한 살얼음 위를 걷 듯 가벼웠고 차려놓은 초례(醮禮)상 앞으로 다가서는 새색시걸음 마냥 단아하고 예뻤다.
그녀는 늘 봄과 함께 내게로 왔다.
그녀가 내게로 오면 봄이 왔고 봄이 오면 그녀가 왔다.
작년 이맘때쯤에 내게로 온 후 근 1년 만에 지금 내게로 오고 있다.
늘 그랬다.
방금 내 얼굴을 때리면서 지나는 차갑고 매서운 삭풍에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내 앞에서 일순간 떼로 후다닥 날아오르는 비둘기 날갯짓에도 나는 눈감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내게로 걸어오는 그녀의 작은 발이, 그 발걸음에 맞추어 예쁘게 흔들리는 양손이 너무 귀하고 예뻐서 잠시라도그녀에게서 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확히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에 서서 그녀가 오기만 기다린 것이 꽤나 오래된 듯싶다.
어떤 날의 기다림은 참으로 지루하고 고되었다.
그런 날의 기다림에는 그녀가 오지 않았다.
또 어떤 날의 기다림은 몹시도 춥고 차고 긴 바람과 맞서야 했다.
그런 날의 기다림에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런 날
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는 기다림이었지만 그런 날의 기다림에는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겨울 낮은 참으로 짧았다.
여명으로 밝아 올라 박모(薄暮)로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이 찰나로 느껴진다.
해는 짧고 기다림은 길었다.
겨울해는 잠시 노을의 향연을 보내고 이내 서산(西山)으로 떠나 버렸다.
해가 떠난 자리에 어둠이 자리하고 그 어둠 속 이리저리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만이 나를 잠 못 들게 하였다.
바람에 내 몸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휘청였다.
오늘 밤은 달도 없다.
나의 시계(時界)와 인간들의 시계는 다르지만 나는 오늘이 인간들 시계로 그믐날 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칠흑의 어둠이 나를 감싸고 나를 감싼 어둠을 한풍(寒風)이 훑고 지나갔다.
이런 날은 그녀가 더 그립고 그녀가 더 보고 싶다.
내게는 발이 없다.
내게는 손도 없다.
내게 달린 발은 땅속 깊이 박혀 옴짝달싹 조차 하지 못하고 내게 달린 팔과 손은 그저 하늘을 향해 벌리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바람이 차고 거셀 때 내 팔과 손은 그저 웅웅 거리는 소리만을 뱉어냈다.
발이 있어도 그녀를 찾아갈 수도 없고 손이 있어도 그녀를 부를 수도 없다.
나는 의식만 있을 뿐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다.
나는 나무다.
매년 봄에 하늘을 향해 벌리고 있는 내 팔과 손에서 피는 꽃을 보고 사람들이 매화(梅花)라고 하는 것을 보니 나는 매화나무인 듯하다.
내가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들에게서 익숙함을 느끼는 것을 보면 내 전생은 사람인 듯하다.
그저 생각이다.
전생에서 사람이었던 내가 어쩌다가 이 자리에서 매화나무로 환생하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내 영원한 윤회의 굴레 중에 이번이 매화나무로의 환생차례였구나 생각하고 있다.
매화로 땅에 서서 계절과 맞서며 그녀를 기다리는 업(業)의 굴레를 지나고 있구나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 나는 동물들만이 의식이 있고 식물들은 의식이 없는 줄 알았다.
처음에 나는 나무이면서 의식을 가진 내가 신의 축복을 받았을 거라 여겼다.
그래야 움직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신세에 위로가 될 것 같았다.
나는 가끔 내 옆에 나와 흡사한 모습으로 서 있는 매화나무들에게 말을 붙이고 눈빛을 보내 보았다.
그러나 방금 내가 한 말은 내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고 내가 보낸 눈빛은 이내 되돌아와 내 몸에 박혔다.
내가 한 말은 나만 들었고 내가 보낸 눈빛은 나만 느꼈다.
그리고 보니 내 몸 어디에도 입이 없었다.
내 몸 어디에도 눈이 없었다.
그저 나 혼자 말하고 나 혼자 느끼고 있었다.
어느 때 그녀가 그리워 흘렸던 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내가 눈물이라 여겼던 것은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가슴속으로 속으로 파고든 내 아픔의 절규였다.
내 업(業)의 굴레에 대한 몸부림이었다.
지금 내 옆에 서있는 매화목(梅花木) 전부가 나처럼 삶을 의식하고 있는지 그저 무의식으로 서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녀가 어느새 내 지척(咫尺)까지 왔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체취만으로 보지 않고서도 나는 단박에 그녀임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껏 그녀가 한 번도 나를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으니 어쩌면 그 멈춤은 당연하리라.
걸음을 멈춘 그녀가 내 팔과 손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가 이내 두 손으로 내 팔과 손을 만졌다.
내 앞에 멈춘 그녀는 매번 그랬다.
지금 내 가지는 아직 매화를 피우지 못하고 있다.
이제 겨우 꽃망울만 피워 놓았다.
인간들의 시계가 입춘이 지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내 가지 앞에서 서너 송이 꽃망울을 손으로 가볍게 만지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망울이 피었네.
어쩌면 이렇게 예쁘고 어쩌면 이렇게 귀여울까?
니가 꽃피는 것을 보니 봄이 곧 오겠지-
그녀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내 꽃망울을 사진에 담으려나 보다.
그녀 휴대폰 배경화면에 내가 있었다.
작년 봄 내가 매화를 만개하였을 때 찍은 사진을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행복감이 내 몸 전체로 퍼졌다.
한 겨울의 한풍(寒風)을 참고 견딘 보람에 입가에 웃음이 번졌지만 내 웃음은 나만의 느낌이었다.
그녀는 보지 못하였다.
그녀가 돌아갔다.
한참을 내 앞에서 나를 보고 나를 만지던 그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분명 내일 다시 내게로 올 것이라는 것을ㆍㆍ
그녀는 내가 꽃망울을 피웠을 때부터 만개(滿開)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게로 온다는 것을ㆍㆍ
자주 나는 갈망하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 매화는 망울로만 있고 더는 피지 않았으면 바랬다.
영원히 꽃이 만개하지 않고 망울로만 있기를 바라고 소망하였다.
그래야 그녀가 매일 내게로 올 거라 생각하였다.
그래야 내 매화가 만개할 때까지 그녀가 내게로 올 거라 여겼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또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은 늘 차가운 바람을 데리고 왔고 그 바람은 가끔 뒷산에서 부엉이를 불러 내었다.
내 주위에 어둡고 차가운 바람이 곁에 머물지만 오늘 밤은 춥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다.
그녀의 온기가
그녀의 체취가 아직 내 몸에 있어 오늘 밤은 행복하다.
밤은 또 일순간 지나갈 것이고 밤이 지나면 해가 다시 뜰 것이고 해가 뜨면 그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 밤이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다.
그녀가 또 내게로 걸어오고 있다.
어제 그 시간에
어제 그 걸음으로...........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내 팔에 맺힌 매화가 어제보다 더 많이 피어나 있었다.
내 갈망과 소망보다 봄 햇살이 더 따사로웠나 보다.
내 앞에선 그녀의 웃음이 어제보다 더 환하다.
어제보다 더 핀 내 매화만큼 그녀의 웃음이 크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로 올 날들이 줄어들 것이다.
내 매화는 나날이 더 피어나고 그녀의 얼굴에는 나날이 웃음이 피어났다.
그녀는 이후 딱 열흘간 내게로 왔다.
내 매화가 그때 만개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 일 년간 그녀를 기다려야 한다.
나는 또 그녀가 다시 내게로 오기까지 나는 나 혼자서 봄의 향연을 보아야 하고 햇볕에 맞서 뜨거운 여름을 견뎌야 한다.
또 내 몸에서 낙엽이 지는 것을 느끼고 다른 나무에 단풍이 드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춥고 긴 겨울을 보내야 한다.
달조차 없는 겨울의 그믐날 밤에 나는 또 혼자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래야 봄이 온다.
봄이 와야 내 팔과 손에서 꽃망울이 맺히고 그래야 또 그녀가 내게 올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 이런 길고 아픈 기다림은 곧 예쁜 걸음걸이로 내게로 오는 그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를 볼 수 있는 날이 딱 열흘일지라도 나는 이 기다림이 좋다.
내 윤회의 굴레가 길고 지루한 매화의 기다림일지라도.........
나는 외로운 매화 孤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