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東柱)의 술 사랑은 어쩌면 도(度)가 지나쳤다.
그는 한 잔 술에 온 세상이 즐거웠고 두 잔술에 세상이 평화로웠다.
술기운이 아직 그의 몸에 남아 있을 때 그는 마냥 행복해하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해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동주 그가 스스로 자신의 이름 석자 중 주자(字)가 술주(酒) 자라 할 만큼 그가 술을 찾았고 술이 그를 불렀다.
가끔 그는 생각하였다.
... 만약 이 세상에서 술이 없었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런 행복들은 자주 사람들의 상식을 벗어나 있기도 하였다.
어쩌면 사람들의 상식이 그를 벗어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주 스스로는 자신을 애주가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주변사람들은 그를 주당(酒黨)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사람 중 많은 사람들도 동주와 같은 주당들이었다.
그들 주당들은 스스로를 술친구라 부르며 다녔다.
같이 취했을 때 술친구, 주당인 그의 친한 친구들은 동주를 일컬어 한정치산자(限定治産者)라 말하며 놀리기도 하였다.
-동주 자네.
한정치산자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사리분별이 바르지 못해 자신의 것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법이 그에게 자신의 재산 처분권을 제한시킨 사람을 일컫는 말이야.
자네 같이...
하하하~~-
친구들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법이 꼭 자네를 위한 법이구만-
동주도 답하였다.
주당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
친구 서넛이 함께 어울려 동네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소주라도 한잔 하는 날
소주 한 병이 비워질 때 동주는 그의 아들이 대학수능시험에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어머니의 얼굴마냥 행복하였고
소주 두 병이 비워질 때 그의 얼굴은 10년 전 빌려주었다 떼인 큰돈을 다시 받은 전주(錢主)처럼 기분이 좋았다.
세 병의 소주에 그의 얼굴은 목사님, 신부님, 스님의 자애로움으로 가득하였다.
더 이상의 소주병이 그의 앞에서 스러질 때 숫제 그는 창조주였다.
창조주 동주가 서빙을 하고 고기 굽는 것을 조금 도와주는 아주머니를 불러 손에 5만 원 지폐를 쥐어주며 말했다.
-아주머니
고생이 많지요?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집에 갈 때 택시 타고 가세요.
오늘 고기 굽느라 고생이 너무 많으셨습니다.-
말하는 그의 혀는 C자로 구부러져 있었고 그의 앞 테이블에는 이미 서넛의 소주병들이 나 뒹굴고 있었다.
생각보다 큰돈을 받은 아주머니는 당황해하였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런 장면들을 예사로 보았다.
그날 서넛이 먹은 식당비가 4만 원이 조금 넘어 나왔는데 더치페이로 식대를 계산한 동주는 한 시간여를 걸어서 집으로 갔다.
그의 주머니에는 천 원 한 장이 없었다.
사람의 호불호(好不好)는 늘 일치하지는 않았다.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가족들에게 까지 그렇지만은 않았다.
젊었을 적 동주 아내는 그런 남편이 몹시도 못마땅하여 자주 다투었고 싸움이 컸던 어느 날은 속상한 마음에 몇 가지 옷가지를 챙겨 친정으로 간 적도 있었다.
몇 번 그런 날이 있었다.
어느 날은 퇴근길에 딸 수정의 학원비를 은행에서 찾아오다 친구들과의 한 잔에서 오늘은 기어이 자신이 사야 한다며 수정의 한 달 학원비를 몽땅 술 집에 준 적도 있었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좋아하였고 가족들은 그의 오지랖에 몸서리쳤다.
사람의 천성(天性)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성격이지만 그것은 하늘이 준 것이라 천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과 자신만이 할 수 있었다.
하늘이 동주의 천성을 바꾸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고 동주도 그런 자신의 성격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동주 아내가 그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는데 꼭 30년이 걸렸다.
젊었을 적 동주와 아내가 다투던 날,
어린 딸 수정은 이해되지 않는 아빠를 원망하였고 아빠에 대한 원망만큼이나 엄마에 대한 연민도 컸다.
아들 상원은 도(度)가 조금 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 좋고 착한 아빠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 마음이 악(惡) 한 것보다 마음이 약(弱)한 아빠성격이 훨 좋은 게 아닌가...
수정과 상원은 자신들의 그런 속내를 크게 티 내지 않고 자라 어른이 되어 지들 배필을 만나 독립하였다.
어느 순간
동주아내는 동주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을 보고 참아왔던 자신의 인내에 한계를 보고 느꼈다.
이제 동주의 아내는 동주의 행동을 이해해 줄 이유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어쩌면 그 한계는 어느 순간 급작스레 느낀 것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산물(産物) 인지도 모르겠다.
... 이 사람한테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은 차라리 말(馬)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내가 말을 말자.
말하는 내 입만 아프고 듣는 저 양반 귀만 아플 터이니...
사람이 사람한테 주는 가장 강력한 벌은 무관심이었다.
사람이 사람한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대응은 무대응이었다.
그날 이후 동주 아내는 동주한테 무관심하였고 그의 행동에 일체의 대응도 하지 않았다.
동주가 술이 취해서 집에 오던, 누구에게 무슨 오지랖을 떨던 아내는 희비(喜悲) 하지 않았다.
동주 아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잔인으로 남편을 대하였지만 정작 동주 스스로는 아내의 그런 잔인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동주는 그런 아내가 편하고 고마웠다.
처음에 동주는 이제 아내가 자신을 이해해 주는 줄 알았다.
이제야 내 크고 깊은 대인배의 마음을 아내가 알아주는구나 생각하였다.
동주의 큰 착각이었다.
그즈음 동주의 정년퇴직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동주의 착각은 꽤나 오래갔었고 아내의 세월에 남편 동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랬던 동주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틀렸다고 느낀 것은 그가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그전부터 아내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조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편안함의 뒤에 숨어 구태어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즈음 동주의 현실은 죽음과도 같은 깊은 고요함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독립해서 나가고 둘이 남은 넓은 아파트에서 동주와 아내는 서로 타인이었고 서로에게서 이방인이었다.
동주의 말에 아내는 대꾸하지 않았고 아내의 무대꾸에 동주도 했던 말을 다시 하지 않았다.
퇴직 후 경제력을 잃은 동주는 점차 작아지고 움츠려졌다.
그렇게 둘은 하루에 조금씩 자라는 콩나물만큼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쯤 동주의 한없이 넓은 오지랖의 양(量)도 확연히 줄어들고 있었다.
경제력을 다한 가장(家長)의 눈물겨운 선택이었다.
- 여보.
내일 장인 기일인데 몇 시쯤에 집에서 출발해서 갈까?-
........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응?
몇 시에 출발할까?-
-나 혼자 갔다 올게요.
혹여 내가 내일 집에 오지 못하면 끓여놓은 국에 밥 챙겨 먹어요.-
아내가 가스레인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스레인지 위에 식은 국냄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동주의 마음도 서늘히 식어갔다.
동주 장인은 돌아가신 지 올해로 5년째가 되었다.
아내는 친정아버지 기일에 3년간 참사(參祀)하더니 작년 기일에는 가지 않았다.
친정 올케가 다 늙은 시누이가 아버지 제사를 핑계로 집으로 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스스로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의 생각이 실제 올케의 마음인지 자기 방어적 자신의 생각인지 분명치는 않았다.
오늘 동주가 아내에게 말할거리 하나를 만들었다가 괜스레 가스레인지에 얹힌 식은 국냄비만 보았다.
둘이 사는 넓은 아파트에서 나는 모든 소리들은 기계음들이 채웠다.
TV소리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청소기 소리ㆍㆍㆍ
그즈음 시집간 딸 수정이 집으로 오면서 키우던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엄마 당분간 얘 좀 키워줘.
시우(수정의 아들)와 얘를 같은 공간에서 키울 수 없어서 그래.
부탁해 엄마.
대신 얘 밑에 들어가는 일체의 비용은 내가 다 부담할게-
수정은 강아지 이름이 뭉치라고 하였다.
곳곳에서 사고를 치고 다녀서 지어진 이름인데 지금은 이 아이도 나이가 있어서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딸 수정은 시우가 먹는 음식을 뭉치가 핥고 자주 털이 날려 기관지에 좋지 않다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였다.
뭉치를 수정이 입양한 지 12년이 넘었다고도 하였다.
수정은 자신의 엄마, 아빠의 냉(冷)한 사이를 알고 그 중간으로 재롱이 주특기인 지금껏 자신이 키워왔던 뭉치를 밀어 넣었던 것이었다.
뭉치를 매게로 둘이 대화라도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동주 아내는 기겁하며 딸 수정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아내의 거절은 강아지가 사고를 치고 털이 날리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렸을 적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누렁이가 동네 어느 집에서 놓은 쥐약을 먹고 들어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과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비누를 갈아 누렁이에게 먹였지만 이미 쥐약의 독성이 온몸에 퍼진 강아지는 방금 먹은 비누와 얼마 전 먹은 쥐약을 함께 토하고 죽었다.
그날 이후 동주 아내 집에서는 더 이상 개를 키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자신딸의 어머니이고 손자의 할머니이다.
딸과 손자 둘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아픈 추억들은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더군다나 누렁이 나이 12살
사람의 나이로 따지자면 일흔 노인인데 싶어 못 이기는 척 수정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 힘들어하는 뭉치의 마음을 안정시킨 사람은 의외로 그녀의 남편 동주였다.
동주는 태생적으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을 좋아하고 사랑하였다.
이 또한 동주의 오지랖이었다.
그의 동식물 사랑은 유별났지만 그는 특히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였다.
거기에다 기계소리들만 들리던 썰렁한 넓은 아파트에 살아있는 생명 뭉치가 새로운 소리를 불러왔다.
동주가 먹이를 주면 작게 짖어 행복해하였고 배변 후에는 치워 달라고 동주 앞에서 낑낑대었다.
동주는 틈만 나면 뭉치와 산책하고 목욕도 시켰다.
인터넷을 뒤져 강아지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사서 먹이고 앙증맞은 옷도 사다 입혔다.
어린 아이던, 동물이던 자기를 거두는 사람은 기가차게
알아보고 따랐다.
뭉치도 그랬다.
자신을 아껴주는 동주가 집안 어디를 가던 졸졸 따라다녔다.
숫제 껌딱지였다.
뭉치가 동주의 집에 오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둘은 그렇게 친해졌다.
외롭고 허전한 자신에게 오만가지 재롱을 부리고 말동무가 되어준 동주는 뭉치가 고마웠고 뭉치는 자신을 챙겨주는 바뀐 주인 동주가 고마웠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다.
동주는 자주 지금 자신이 care 하고 있는 뭉치가 자신의 아내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마음으로 뭉치를 보살피고 있었다.
퇴직 후 지금까지 동주의 묻혀있던 오지랖의 천성이 뭉치를 만나고 서서히 다시 드러났다.
천성이 바뀌면 죽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듯 보인다.
동주는 일정하게 주던 뭉치의 식사 외에 수시로 간식을 주었고 그 간식들은 사람에게는 무해(無害)하지만 강아지에게는 맞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조미료가 들어가고 간이 된 원래부터 강아지에게는 금지된 음식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디테일의 금지사항은 동주의 오지랖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는 그가 식사를 하고 간식을 먹을 때 여지없이 그는 먹던 음식들을 뭉치에게 나누어주었고 뭉치는 동주가 주는 음식을 다 받아먹었다.
동주는 늘 자신이 먹던 음식을 주며 뭉치에게 말했다.
-뭉치야
사람들은 희한하지?
자기들은 몸에 안 좋은 콜라, 커피, 술을 마시면서 왜 너한테만 아빠가 먹던 음식을 못 먹게 하는지 말이야.
그치?
뭉치야.
넓은 아파트에서 들리는 유일한 사람의 소리였다.
동주의 오지랖과 뭉치의 식탐의 합(合)이 기가차게 맞아떨어졌다.
아내는 처음부터 남편 동주가 뭉치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 못마땅하였지만 지금껏 남편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학습효과가 있어 아예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방관이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갔다.
동주 아내의 생일은 음력 5월이었다.
그녀의 생일에 맞추어 딸 수정이 남편과 아들 시우를 데리고 동주집으로 왔다.
수정의 손에 평소 그녀의 어머니가 갖고 싶어 하였던 값이 꽤 나가는 명품가방이 들려있었다.
생일 선물이었다.
수정가족이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자 뭉치가 격하게 이들을 맞았다.
강아지에게 한 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이었다.
반기는 뭉치를 안아 올린 수정이 깜짝 놀라며 아빠 동주를 쳐다보았다.
아니
노려 보았다.
-아빠
지금도 뭉치한테 아빠 드시던 음식을 줘?
수정의 질문은 그럴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서 날카로웠고 왜 그랬느냐는 원망이 가득 차서 차갑고 단호하였다.
동주는 아내가 딸수정에게 수시로 자신이 뭉치한테 음식을 나누어준다고 꼬질러 바친다는 것을 아내와 딸이 하는 몇 번의 통화를 엿들어 알고 있었다.
동주는 딸 수정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 물음은 물음이 아니라 따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그런 따짐에 대답해 봤자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세월이 알려주었다.
이럴 때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급히 집에서 나오는 바람에 자동차 열쇠도, 지갑도 가져오지 못하였다.
휴대폰조차 집에 두고 나왔다.
아직 6월인데 날씨는 벌써 한 여름의 뜨거움을 아스팔트 위에 내려놓았다.
길가 가로수에서는 참매미들이 떼창으로 울어대었다.
갈 곳이 없었다.
마음 편히 찾아가 볼 만한 친구도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동주는 갑자기 지나온 자신의 세월이 허무해지고 허탈해졌다.
내가 대체 지금껏 어떻게 살아온 거야?
내가 대체 지금껏 누구를 위해 살아온 거야?
하마터면 길을 걸으면서 후회와 회한의 생각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하였다.
그저 걸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껏 수십, 수백 번 다녔던 이 길을 두 발로 걸어서 다녔던 적은 몇 번 없었던 것 같다.
자동차로만 다녔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달구어진 아스팔트 열기 때문에 현기증도 살짝 나는 것 같다.
급히 집에서 나온 지 두어 시간은 지난 것 같다.
... 이제 들어가야지
지금쯤 수정이도 화가 거의 누그러졌겠지...
동주가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뭉치가 거실소파에서 뛰어내려 집으로 들어오는 자신을 마중 나오는 환영이 보였다.
지금껏 한번도 빠지지 않고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뭉치가 나오지 않았다.
거실에 아무도 없었다.
방에도 아무도 없다.
집안이 휑하다.
... 나만 빼고 수정이 지 엄마 생파(생일파티)를 하러 식당에 갔나?...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왠지 모를 불안감이 동주의 생각을 덮었다.
... 아~
휴대폰...
동주는 자신의 방에 두고 간 휴대폰을 보았다.
아들 상원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4통이 와있었고 딸 수정도 한통의 부재중 전화를 보태 놓았다.
얼른 아들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신호가 가고 아들이 이내 전화를 받았지만 동주의 불길한 생각은 길었다.
-아빠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아?
지금 바로 우리 집 부근 지하철 뚝섬 옆역 근처에 있는 제일동물병원으로 가보세요.
어서요.
저도 지금 거기로 가고 있어요.-
아들은 동주의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
아들의 말에 왜?라는 생각은 어쩌면 사치이고 게으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동주의 마음을 급하게 하였다.
동주의 집에서 뚝섬 옆역 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마침 동주가 아파트 정문을 나서자 바로 빈택시가 보였다.
당연히 택시요금은 기본요금 4,800원이 나왔지만 동주는 만원을 기사에게 주고 용수철이 튀듯 튀어서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기사의 -손님 잔돈요-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동주는 머리뒤로 그냥 가시라고 손을 흔들었다.
제일동물병원
문을 열고 병원 안으로 들어서는 짧은 순간
동주의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불길한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들어선 병원 안에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자 수의사가 보였다.
그리고 수의사와 마주 보고 아내와 딸이 서 있었다.
사위는 손자 시우와 대기실에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딸 수정이 그렇게 하라고 했는 모양이다.
마주 보고 선 세 사람의 얼굴이 심각해 보였다.
동주가 병원에 들어선 것을 아내와 딸 수정은 마주 보고 선 수의사가 동주에게 하는 목례를 보고 눈치채었다.
뭉치는 보이지 않았다.
- 사모님!
강아지 이름이 뭉치라고 하였지요?-
수의사가 동주 아내를 보며 물었다.
-네-
대답은 딸 수정이 하였다.
-선생님
우리 뭉치가 왜 갑자기 이래요?
이유가 무엇인지, 또 지금 원장님이 무슨 조치를 취해 주시면 괜찮아질 것인가요?-
수의사를 바라보는 수정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넘쳐 보였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 뭉치가 오늘 아침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구토를 한 의학적인 병명은 심장병입니다.
심장에 이상이 생긴 병이죠.-
수의사가 딸 수정을 보며 대답하였다.
동주의 아내는 그저 뭉치가 누워있는 치료실에 눈을 두고 멍하니 서있었다.
-심장병이라뇨?
뭉치는 이틀에 한 번씩 산책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상증세를 보이지 않았어요.
그쵸?
엄마-
딸 수정의 급작스런 물음에 그저 서 있기만 하였던 동주 아내가 화들짝 놀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야.
한 6개월 전부터 사료를 먹고 물을 마시다가 자주 켁켁이며 헛구역질을 하기는 하였어.
그럴 때 내가 등을 두드려주고 쓰다듬어 주면 금방 그쳤어-
- 왜 그럼 그때 진작에 병원에 데려가 보지 않았어?
하다 못해 나한테 전화라도 해주었으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 아냐?-
수정은 동주와 아내를 번갈아 노려 보며 울부짖듯 말했다.
뒤늦게 동주 아들 상원이 헐레벌떡 뛰어서 병원으로 들어왔다.
-저기 보호자님
지금 이래 봤자 뭉치 회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 계시고 제가 오늘 밤과 내일 하루 뭉치 상태를 지켜보고 상황파악을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네 분
오늘은 일단 댁으로 돌아가시고 제가 내일 중으로 전화를 드릴 터이니 그때 다시 오시죠.
지금껏 다급한 보호자들을 많이 상대해 본 수의사는 담담하고 침착하게 넷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수의사의 권유에 의해 동주 가족들은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왔다.
뭉치만 홀로 입원실에 누워 오늘 하루에 자신의 생사를 맡기고 있었다.
다음 날
딸 수정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그렇지 않아도 동주 아내가 아침 설거지를 막 마치고 병원으로 전화를 하려고 한 차였다.
제일동물병원 원장의 목소리였다.
가능하면 지금 바로 병원으로 좀 오라고 하였다.
...가능하면 지금 바로...
딸 수정은 원장이 한 지금 바로라는 말이 신경 쓰이고 불안하였다.
병원에는 동주와 아내, 딸 이 셋만 갔다.
셋은 병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어제 뭉치가 누워있던 입원실로 달려갔다.
... 뭉치야
제발...
수정은 말로, 동주와 아내는 생각으로 지금 뭉치의 안녕과 앞으로 뭉치의 무탈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불안하였다.
불길한 예감은 늘 맞았다.
뭉치는 눈은 반쯤 뜨고 혀도 반쯤 입 밖으로 내밀어 있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앞다리에 링거를 꽂고 힘겹게 삶의 끈을 잡고 있었다.
아내와 딸 수정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고 동주는 뒤돌아서 고개를 숙였다.
동주도 울었다.
원장이 동주에게 입원실 밖으로 나가자고 눈으로 말했다.
-보호자님!
제가 어젯밤 늦게까지 뭉치를 지켜보았습니다.
뭉치는 지금 심장이 너무나 상해 있습니다.
심장이 제 역할을 못하니까 숨을 켁켁이고 헛구역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저 아이는 살아있는 것이 고통입니다.
원장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원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수술조차 되지 않는군요.
밖으로 나온 아내가 겨우 고개를 들어 원장을 보며 말했다.
-지금 뭉치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수술의 성공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더 높습니다.
무엇보다 자칫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원장이 아내에게 말했다.
-아니
얼마 전까지 멀쩡하던 아이가 왜 하루아침에........
딸 수경의 말은 여전히 날카롭고 탁하였다.
누구든 걸리기만 해 봐라는 말투와 눈빛이었다.
-뭉치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의 몸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가족분들께 표시를 하였어요.
다만 이 아이가 그 표시를 과격하게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은 그 생명이 다하고 나면 전부 떠납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 내자필거(來者必去)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뭉치의 나이 올해로 13살
노견입니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구십이 넘었어요.
원장이 눈을 감았다.
-그래서 어떻게?
동주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이제 뭉치를 보내주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지금도 어쩌면 뭉치는 들이쉬고 내뱉는 호흡 하나조차 힘이 듭니다.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제 생각입니다.
원장은 구태어 안락사라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뭉치가 얼마나 더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을까요?
이미 수정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뭉치가 지금 바로 무지개다리를 건너도 하나 이상 할 것이 없지만 스스로 억지로 삶을 붙잡고 있을 수 있다면 길어야 일주일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그 일주일이 고통의 시간입니다.
셋은 뭉치를 보내기로 하였다.
고통으로 남을 일주일보다 가족이 되어 행복했던 12년과 1년을 가슴에 두고 뭉치를 보내기로 하였다.
뭉치의 13년 삶은 짧은 주사 한 대로 끝이 났다.
주사가 몸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뭉치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속에 든 모든 것을 토하였다.
네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뭉치야
이제 더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떠나.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떠나.
이제 떠나도 돼.
잘 가~
딸 수정이 아직 체온이 남아있는 뭉치의 머리를 만지며 흐느꼈다.
수정의 말이 끝났을 때쯤 뭉치가 눈을 감았다.
심하게 떨고 있던 다리가 편안히 침대 위로 놓였다.
동주와 아내는 수정을 사이에 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동주는 15년 전 어머니를 보내 드리고 오늘 처음 흐느낌으로 울었다.
병원 직원이 셋을 휴게실로 안내하였다.
조금 있다 다시 부르겠다고 하였다.
동주는 아무도 반기지 않았던 자신을 온몸으로 뛰어오르며 반기던 뭉치가 지금이라도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에게 안길 것 같았다.
그런 환영이 잠시 또 동주의 눈을 훑고 지나갔다.
휴게실의 고요함을 셋의 흐느낌이 채웠다.
셋이 휴게실에 들어간 지 20여 분 만에 병원직원이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하였다.
조금 전까지 뭉치가 고통으로 누워있던 침대가 꽃으로 단장이 되어있었고 꽃 가운데 뭉치가 누워 잠들어 있었다.
뭉치는 편안해 보였다.
뭉치의 얼굴이 웃는 듯 행복해 보였다.
원장이 이제 떠나려는 뭉치를 편안히 보내자고 하였다.
뭉치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다.
지금 가족들이 하는 말은 뭉치가 귀에 담고 가슴에 담고 떠날 것이라 하였다.
그 말은 뭉치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될 것이라 하였다.
-뭉치야.
잘 가.
이제는 아프지 말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잘 잘아.
동주 아내는 뭉치를 보며 짧게 말을 하고 이내 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뭉치 잘 가
아들 상원도 짧게 뭉치를 보며 인사하고 한걸음 뒤로 물어섰다.
-뭉치야
우리 가족으로 살아줘서 고마웠어.
니 덕분에 행복했어.
잊지 않을게
잘 가.
수정이 뭉치 앞에서 상체를 숙이고 울고 울었다.
동주는 울지 않았다.
동주는 웃었다.
-뭉치 이놈
이제 일어나야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잠을 자?
아빠 이제 밥 먹을 시간인데 아빠 혼자 먹을까?
너 안 줘도 돼?
계속 그렇게 누워만 있으면 아빠 혼자 먹는다 그럼
동주가 울었다.
동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동주는 자신이 준 해로운 음식으로 뭉치가 급작스레 떠났다는 자책에 몸서리를 쳤다.
그 자책에 딸 수정의 싸늘한 말투와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아내의 무심(無心)이 동주를 짓눌렀다.
뭉치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그 이듬해.
동주가 죽었다.
서로 다른 방에서 생활하였던 아내가 이틀째 동주의 방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방문을 열어 보았더니 동주가 반듯이 누워 죽어 있었다.
부검의(醫)검안서 사인(死因)이 심장마비라 적혀 있었다.
죽은 지 이틀이 지났다고 하였다.
동주의 장례식장에 문상온 그의 친구가 아내를 보고 흐느끼며 말했다.
-제수씨
동주는 고독사 하였어요.
이 친구 자주 우리한테 울면서 말했어요.
지가 밥 주던 강아지는 안락사하였지만 지는 아마 고독사 할 것 같다고요.
동주는 고독사 하였어요.
친구들이 동주의 영정에 동주가 그토록 좋아하였던 마지막 술 한잔을 올렸다.
아내는 울지 않았다.
하얀 국화꽃에 쌓인 영정사진 속 동주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뭉치가 그랬던 것처럼ㆍ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