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봐, 이(李) 백수, 점심은 드셨나?"
좀처럼 울지 않아서 캔디폰이 된 지 꽤 오래된 내 폰에서 친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수!!
퇴직을 하고 처음 몇 년간은 참으로 익숙하지 못하였고 그 익숙지 못함 때문에 나는 꽤나 당황스럽고 꽤나 어색하였다.
나 스스로가 그 낯설고 어색함에서 조금 비켜 앉으려 나 백수요 하며 다닌 적도 많았다.
( 사실은 지금도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하는 일을 물어오면 직업이 백수라고 한다 )
내 평생에 백수라는 말은 나와는 무관한,
그저 나이 들고 게으른 사람들이 가슴에 장난감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먼 외계의 단어인 줄 알았다.
백수의 계급장을 가슴에 달고 머리에 얹고 다닌 지 5년
이제는 그 백수라는 단어가 하나도 낯설지도, 당황스럽지도, 거북하지도 않게 자연스럽다.
아니 이제는 친숙하게 들린다.
나에게 전화한 그 친구도 백수이기는 매일반이다.
그저 나는 李백수, 그는 崔백수이다.
두 백수가 전화로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하고 만났다.
백수의 사전적 의미는 만 19세 이상의 성인이면서 대학생, 대학원생, 병역 이행 중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라지만 나와 최 백수는 아무 직업이 없고 당연히 아무 수입도 없는 손이 하얀 白手가 아닌 월 백만 원의 수입이 있는 百收라며 둘이 괴변을 늘어놓으며 서로를 위로하지만 사실 둘은 국민연금을 받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입이 없다.
다행히 연금수령액이 백만 원을 넘으니 白手가 아니라 百收임에는 틀림이 없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같은 말을 한다.
"자네 요즘 얼굴색이 좋아
그것도 아주 많이"
인사로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이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재직을 할 때 꽤나 많았던 주름들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이 들어 주름이야 왜 없겠는가 만은 그 주름은 인생의 나이테 주름이니 그때의 주름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선천적으로 위장을 약하게 타고 태어났다.
그것 때문에 나는 지금껏 수백 번을 더 채하였고 그 채기 때문에 수백 번을 더 바늘로 손가락을 찔렀다.
식사를 조금만 급하게 하거나 불편한 식사를 하면 어김없이 나는 채하였고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검은 피를 뽑아내야 했다.
그러나 백수가 된 지금은 좀체 채하지도, 바늘로 손가락을 찌를 일도 없다.
이제는 아무도 나의 식사시간을 채근하지도 않고 스트레스를 안고 식사를 할 일도 거의 없다.
아침에 내게 점심을 제안한 친구 崔백수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였다.
천천히 꼭꼭 씹어가면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하면서 신선들의 식사를 하였다.
뒤에 알았는 일이지만 우리처럼 음식을 천천히 씹으면 소화액의 분비가 활성이 되어 소화가 잘 되고 심지어는 치매도 예방이 된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식사를 마치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조금 전 점심을 먹으면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마저 하였다.
시간의 제약이 우리 둘에게는 전혀 없다.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도 우리에게는 없다.
세상 급할 것이 하나도 없다.
추분의 절기가 지나서 인가 해가 한여름보다는 훨씬 일찍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서산 꼭대기에 걸터앉아 있다.
하루가 가려나 보다.
李백수, 崔백수가 만나 족히 여섯 시간을 같이 있은 것 같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최백수
우리 이제 집으로 갈까?"
백수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백수생활 5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지금 생활이 의미 없이 허송세월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남은 삶이 쓰임새가 없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내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서 수입이 없음을 걱정하거나 한탄해보지 않았다.
나는 철저히 지금의 여유롭고 한가한 백수생활을 즐기련다.
지금부터의 삶은 그동안 수고한 나에게 포상의 휴가를 주고 나는 나에게 받은 포상휴가를 잘 즐기련다.
어느 학자의 말이 생각이 난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행복할 때가 60의 나이를 넘어서 사는 삶이라는 말이~~
자식들도 이제는 다 자라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떠났고 60년을 살면서 깨닫고 느낀 인생의 지혜가 있어 삶이 보이고 이해가 되는 나이인 지금이 여유로워서 나는 행복하다.
바쁠 것 없고 억지로 해야 할 일이 없는 지금이 나는 행복하다.
내일은 또 나를 위해 무엇을 선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