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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Jan 26. 2023

아웃사이드의 편안함

어머니는 내가 왼손잡이라는 것을  내가 네 살쯤에 알았다고 하셨다.


이유식을 하고 처음으로 숟가락과 젓가락 쓰는 방법을 나에게 가르치시던 어머니는 처음이라 그렇지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설픈 내 숟가락질을 보고 나의 지능을 걱정했다고 하셨다.

알아들을 만큼의 시간과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늘 처음의 자리를 맴돌고 어제처럼, 어제처럼 하며 어머니의 애간장을 태웠다고도 하셨다.


급기야 나의 어머니는 마을의 다른 아주머니들께 나의 느린 숟가락질을 말씀하셨고 다행히 어느 아주머니께 당신의 아들이야기라며 들으신 것이 왼손에 숟가락을 쥐여줘 보라는 조언이었다고 하셨다.


혹시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왼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셨고 내가 왼손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고 쓰는 것이 또래 아이들 오른손과 같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의 근심도 같이 사라졌다고도 하셨다.


 지금은 왼손을 쓰는 사람들도 많고 그것이 자연스럽지만 내가 자랄 때는 왼손잡이는 거의 볼 수조차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추측건대 왼손잡이는  그 시절에도 꽤나 있었겠지만 왼손을 쓰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로 인해 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지 싶다)


내 심한 왼손잡이는 몇 번을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쓰게 하려던 어머니의 노력도 헛되게 만들었고 나는 내친김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잡은 연필마저도 왼손으로 잡고 말았다.


내 기억으로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나는 왼손으로 밥을 먹고 글을 썼다.


덕분에 나는 학교의 명물이 되었다.

선생님과 또래친구들은 나를 "째비"(왼손잽이를 째비라고 불렀다고 훗날 누군가가 나에게 일러주었다)라고 부르며 놀렸고 내가 왼손으로 밥 먹고 글 쓸 때 내 주위로 몰려와 나를 마치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 보듯 하였다.


그때쯤에 읍내로 일을 보러 나가신 할아버지께서 6.25 사변 때 미군들이 쓰다간 것인데 신기해서 싼값에 샀다며 연필 깎는 기계를 사서 나에게 주셨다.

삐뚤삐뚤하고 삐죽삐죽 삐져나오게 칼로 깎인 다른 아이들 연필에 비하면 연필 깎는 기계로 깎은 내 연필은 부드럽고 매끄러워 보기에도 좋았다.

어떤 때 선생님들 조차 그 기계를 빌려 연필을 깎으셨고 아이들은 그런 기계를 부러워하였고 그 기계 덕분에 선생님께 사랑을 받는 나를 부러워하였다.


쉬는 시간만 되면 우리 반 아이들은 물론이고 옆반 아이들까지도 연필을 깎으려고 나에게 왔고 나는 왼손명물에 연필 깎기 명물이 된 어쩌면 학교의 스타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쯤에는 할아버지의 기력이 쇠해지시면서 아직 중학교에도 가지 않은 나이에 나는 집안의 종손역할을 해야 했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께서 제사, 묘사를 주관해서 지내시다가 할아버지의 기력이 옛날처럼 되지 않으니까 어린 나에게 제사, 묘사 같은 집안  대소사를 맡기신 것이었다.


아직 초등학생인 나는 하얀 도포를 입고 두건을 쓰고 제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서야 했다.

내가 절을 하고 묵념을 할 때 집안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나를 따라 절을 하고 묵념을 하였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다음 일정들이 진행이 되는 나는 진행자였고 그 제사의 주인공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뛰어난 명물은 아니었지만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괸심을 많이 받았다.

시(詩)를 잘 쓰는 아이

노래를 잘하는 아이

생각이 다른 아이들 보다 조금 특이한 아이라며 친구들은 나를 많이 따르며 좋아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입행(入行)에 해서도 나는 또 왼손 때문에 다른 입행동기들 보다 선뱃님들에게 빨리 인식이 되고 각인이 되었다.


내가 은행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만 해도 돈(지폐)을 손으로 세었다.

이것은 다른 보통의 사람들은 하지 않는 일이라 선배들의 가르침이 돈을 세는 기술(?)을 익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나와 같이 입행을 한 3명의 동기들은 지폐를 잡는 방법부터 넘기는 방법까지 선배들의 도움으로 일취월장의 속도로 기술을 익혔지만 나의 오른손은 이것마저도 하지를 못하였다.


결국 선배들에게 지점장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1주일 내에 이종열에게 돈 세는 법을 마치고 지점장님께 검사를 하라는 것이었는데 그 기술은 직접 시범을 보이는 것이 최고인데 지점 전체 선배들 누구도 왼손으로 지폐를 세는 시범을 나에게 보이 지를 못하였다.


내가 다른 동기들처럼 지폐를 능수능간하게 셀 때까지 나는 철저히 독학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1주일 만에 끝낸 다른 동기들에 비하면 나는 꼬박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이때에도 선배직원들은 나를 명물로 대하였다.


인근지역 지점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체육행사를 할 때도 다른 지점에서 근무를 하는 선후배 직원들이 구태어 내가 앉은자리로 와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군대에 가서도 사격을 할 때

제식훈련을 할 때도 나는 늘 다른 사람들에게 특이한 놈으로 보여야 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직장을 퇴직하였을 때까지 나는 늘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았고 어쩌면 나는 그런 것을 즐기며 살았다.


얼마 전 후배직원 대여섯 명과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은행의 옛날과 지금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였는데 현직 지점장 후배친구 하나가 거의 모든 대화를 자신의 주관대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대화의 중심에 늘 자신이 있기를 바라는 듯하였고 사람들이 자신만 쳐다 보기를 비라는 듯 보였다.


그 후배의 얼굴과 몸짓에서 옛날의 내 모습이 보였다.

'내가 저렇게 살았구나~'


그날 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행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후배들의 말과 행동에 나는 그저 '그래 맞다, 참 잘한다, 역시 너다'하는 추임새만 넣었다.


그렇게 편하였다.

50년을 넘게 어깨에 짊어지고 다녔던 무거운 납덩어리를 벗어버린 가벼움이 있었다.


처음으로 아웃사이드의 편안함을 보고 느꼈다.


내가 벗은 납덩어리를 넙죽 받아서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후배지점장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 친구도 10년쯤 지나면 아웃사이드의 편안함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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