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열 Jun 15. 2023

60년을 살고 얻은 다섯 글자

                                         [ 受 ]

감은 머리를 말리려 드라이기를 들고 거울 앞에 섰다.

아직 물에 젖어있는 머리는 그래도 까만색을 띠고 있다.

'휘잉~'

드라이기 소리 한 자락에 조금 전까지 검은색을 띠었던 머리카락들이 기어이 본색을 드러낸다.

하얗다.


젊었을 적 역린(逆鱗)으로 하나씩 삐져나와 새치라는 이름으로 있을 때는 그래도 예쁘고 귀여웠는데 지금 보이는 하얀 머리는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다.

그래도 은색의 백발이라 이름을 지어주어 추하지는 않은 듯하다.


얼굴주름의 반만큼이나 목에도 주름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되었지?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지?


혼자 구시렁거려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다.

하얀 머리와 주름은 그 모습 그대로 내 머리와 목에 위치하고 있다.


-> 받아들이자 (受)

    20,30대의 나이를 가진 젊은 사람들이 그들의 노력에 의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이가 들어가고 흰머리가 늘어가고, 목에 주름이 지는 것도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 그저 마음 쓰지 말고 받아들이자.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은 편하게 받아들이자.



                                [  ]

아직은 칼바람이 분다.

부는 바람에 손이 시리고 얼굴이 따갑다.

그래도 입춘이 지난 지 며칠이나 지났으니 이제 봄도 머지않아 우리 곁에 쑥 다가와 앉을 것 같다.


혹시 하는 마음에 산책길에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서있는 매화나무 곁으로 가 보았다.

하얀 무엇이 나무 몸통에 붙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뭐지?

혹시?'


매화꽃이 아닌가?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보고 싶어 하였던 매화꽃이 드디어 핀 것이 아닌가?


이내 나비가 날고 벚꽃이 피더니 제비가 원을 그리며 파란 하늘을 비행한다.

봄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봄이 그렇게나 좋았다.


기분이 너무 좋아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그런데 어느새 하얗고 앙중맞게 매화꽃을 피웠던 그 자리에 파란 잎사귀들이 꽃을 보내고 떡하니 피어있고 벚꽃도 이내 지고 잎사귀로 가지를 덮었다.


여름이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기다렸던 봄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가버리고 여름이 와 버렸다.


-> 놓아주자 (放)

내가 아무리 붙잡으려 하여도, 내가 아무리 애타게 내 곁에 두려고 하여도 기어이 가야만 하고 내가 보내야만 하는 것은 미련 없이 보내자.

보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진정 보내야 다시 온다는 것을 이제는 알자.



                                       [ 觀 ]

나와 그리 깊지 않은 인연을 가진 사람 하나가 거친 말로, 거친 행동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내 마음을 살짝씩 건드린다.


이 사람과 알고 지낸 것이 10년은 넘었는데 도무지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

말이 거칠고 그 말을 지키려 행동도 따라 거칠다.

이 사람에게 예의라는 것은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따돌림받지 않고 어울릴 만큼의 분량만 있는 듯하다.

 

오늘도 약속 시간보다 20분을 더 늦게 나타나서 우리( 나 포함 3명 )를 기다리게 하고 그 이유를 거친 말로 표현을 하였다.

도로 1차선에는 김여사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2차선에는 대형화물차 한 대가 거의 자전거 속도로 운전을 해서 늦을 수밖에 없었다고ㆍㆍ


-> 나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데 하물며 타인인들 오죽하랴.

하늘에 수도 없이 많은 별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우주를 이루듯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도 전부 다르지 않을까?

그들이 틀리지 않고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알자.

그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자.



                                    [ 佛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끝날 줄을 모르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가 우려스럽게 두 나라를 지켜보고 있고 무엇보다 전쟁 당사국 국민들은 매일을 포탄과 총소리에 공포와 두려움으로 보내고 있다.

세계 경제도 휘청대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실험.

미, 중 양 강대국 간의 패권다툼


세계가 하루도 잠잠하지를 않다.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은 정해진 답인데도, 그런 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스스로가 이것을 깨고 어긴다.

스스로가 두렵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자랄 때 학교에서 배우기를 싸우지 말고 법을 잘 지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라고 배웠지만 그 가르침을 받은 어른들은 그리 살지를 못하고 있다.


-> 이것은 사람의 힘과 의지로는 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늘 싸우고 다투면서 이루어졌고 그 다툼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어갔다.

안타깝지만 이런 일들은 신의 영역인 듯 보인다.

신의 뜻이라 여기고 순응하자.



                                       [ 施 ]

옛날 직장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였던 동료 3명이 또 만나 점심을 먹었다.

날짜를 정하지도 않았고 만나는 횟수를 정하지도 않았지만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무시로 만나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옛날이야기도 하고 지금 이야기도 하면서 전우애(?)를 나누었다.


점심을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커피를 마시느냐 보다 그저 말이 통하고 공감대가 생기는 사람들과의 조우라 좋다.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

'그래, 그러면 커피는 내가 살게'


늘 이렇다.

늘 두 사람만 점심을 사고 커피를 산다.


한 사람은 무슨 마음인지 계산을 할 때 늘 구두끈을 다시 매고 지갑을 차에 두고 왔다고 한다.

'이제는 세 사람 모두 백수인데..... ㅠㅠ'


-> 전에는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두지 않으려 밀어내고 내쳤다.

얄밉기도 하고 내 마음이 꼬였을 어떤 때는 비열하다는 생각까지 들곤 하였다.


생각을 바꾸었다.

이렇게 하는 이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이 사람에게 베푼다 생각을 하자.

보시한다 여기자.



받아들이고 (受)

인정하고 놓아주고 (放)

마음을 내지 말고 그저 지켜봐 주고 (觀)

모든 것은 부처님의 뜻이라 믿고 (佛) <저희 집이 대대로 불교의 집안이라 이렇게 썼습니다>

베풀면서 살자 (施)


내 나이 환갑을 지나면서 배우고 느낀 다섯 글자이다.

하루를 살면서 세상사가 내 마음과 같지 않을 때 나는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受, 放, 觀, 佛, 施를 꺼내 보고 읽는다.


애쓰고 노력은 하되 집착하지는 말자.


다섯 글자가 내 삶에 무엇하나 맞지 않는 것이 없어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