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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Aug 26. 2023

글쓰기 참 어렵다.

"지금 쓰고 있는 제도~

이렇게 고쳐 주세요.

직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이런 제목의 공문이 내 단말기에 도착했다.

나뿐만 아니라 전 직원단말기에도 같은 시간에 같은 내용으로 도착하였을 터이다.


30년이 훨씬 지난 일이었다.

그때 그 문서 하나가 지금의 내 인생에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지 그때의 나는 전혀 몰랐다.

 

내가 다녔던 은행에서는 무시로(거의 3~4년에 한 번씩) 이처럼 지금 시행하고 있는 제도, 규정 등의 불편함을 개선하거나, 시행되지 않고 묻혀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제출하여 달라는 문서가 날아오곤 하였다.

현실과 맞지 않은 제도를 개선하고, 직원들의 응집력을 한 곳으로 모으고자 하는 일석이조의 본부기획이었으리라.


어쨌든 나는 거기에 응모하였고 한 달여 후에 단말기로 발표된 당선자 명단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최우수상 : 이종열

우수상 : 김 xx

장려상 : 이 xx

.

.

.


내가 1등으로 당선이 되어 있었다.

당선자 발표문서 하단에 응모직원수도 기록이 되어 있었다.

아이디어 공모 제출직원 총 1,121명(사실 이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고 그저 1,000명이 넘었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그랬다.

내가 1,000 :1의 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1등으로~~


그때 나는 그 당선작으로 꽤 큰 금액의 상품권을 부상으로 받았고(30만 원) 인사고과에서 플러스 점수를 받았다.

(그 해 하반기, 그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행원에서 대리로 승진 발령이 났었다)


문서발표가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내 자리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문서를 기획한 본부에서 걸려온 전화였고 그 문서를 총괄한 팀장님의 전화였다.


그분은 나한테 축하의 인사를 하고 내 당선과 관련한 후기를 이야기해 주셨다.

그 후기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제출된 1,000여 작을 심사를 하여 고르고 골라 딱 두 편이 1등 작 후보로 선정이 되었는데 두 작품의 우열을 가릴 수 없어 심사위원들이 한참 동안 애를 먹었는데 내가 제출한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하여 훨씬 작품성이 좋았다고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합의를 하여 1등 작으로 선정을 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팀장님이 그렇게 말했다.

"계장님~

나중에 은행을 퇴직하면 꼭 글을 쓰는 작가를 해 보셔요.

틀림없이 계장님은 성공하실 겁니다."


그때 그 팀장님의 칭찬의 말은 부상으로 받은 30만 원의 상품권과, 플러스된 인사고과, 그리고 1,000:1을 이룬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에 묻혀 이내 사라졌다.


그런데 그 팀장님의 예견대로 나는 퇴직하였고 퇴직 후 바로 35년간 묶여 있었던 내 영혼은 마치 우리를 막 빠져나온 망아지 마냥 산과 들을 걷고 뛰며 지냈다.

5년의 세월을 그렇게 지낸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짧은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걷고 뛰고 있는 산과 들에 내가 찾으려는 행복이 있는가?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신께서 내게 주셨던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시려 할 때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았노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느 것 하나 주저 없이 그랬노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 생각의 끝에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의 마음이 이내 지금부터라도 하는 결심과 작심으로 바뀌었다.


아니다.

바꾸었다.


banker를 걷어내고 추수한 밭에 이번에는 무엇을 심을까?

인생이모작을 무엇으로 할까?


며칠을 생각하고 고민하였다.


살아오면서 늘 무릎 꿇고 내 소원만 빌었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도 있게 공부해 볼까?

나의 삶이 바빠서 돌보지 못하였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를 할까?

집안 형편 때문에 가지 못하였던 대학에 들어가 만학(晩學)이라도 해볼까?

생각만 하였던 기타를 배워볼까?


전부 해보고는 싶었지만 선뜻 그 길로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조금 더 앞서 있었던 현실의 어려움 뒤에 내 생각이 숨어있었다.


그러다 문득 20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났고 그날 나는 잃어버리고 애타게 찾던 소중한 물건을 다시 찾은 벅참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래

글을 쓰자.

내 남은 생을 글을 쓰고 글을 읽으면서 보내보자.


궁하면 통하였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마침 나보다 10년 은행선배이신 퇴직 지점장님(그 지점장님은 이미 작가로 등단하여 책 발간까지 하고 계신 분이다)께서 야간수필대학을 소개하여 주셨고 그다음 학기에 바로 등록을 하였다.

글쓰기의 기초부터 배워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야간대학은 내가 생각하고 바랐던 문학을 위한 순수성 보다 class별로 경쟁과 분당을 하는 것 같아 한 달여 만에 그만두었다.

(이는 나의 생각일 뿐 실제 그렇고 그렇지 않고의 여부는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글 쓰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으면 더없이 행복하고 더없이 편안하였다.


그러다가 매일 가는 골프연습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시인 작가님께서 신춘문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자신도 그곳에 꽤 많이 제출을 하셨다가 떨어졌지만 그때 글에 대한 안목이 많이 넓어지고 커졌다며 나더러 무작정 글을 써 보는 것도 좋지만 목표를 정해놓고 그 길을 가보는 것도 괜찮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신춘문예

나는 그곳에 제출만 하면 당선의 가능성이 꽤나 높은 줄로만 알았다.

지금껏 내가 친구나 지인들로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글 잘 쓴다는 평가의 정도로 보아 나는 금세 당선이 될 거야.


도전해 보기로 다짐을 하고 장르는 장편소설로 정하였다.

나는 거의 6개월간 노트북 앞에서 살다시피 하며 1편의 소설을 완성하였다.


'까지껏 한번 제출해 보는 거지 뭐

혹시 알아?

심사위원이 나와 성향이 비슷해서 내 글을 예쁘게 봐서 초작(初作)에 당선이 될지...

그러면 나는 단 한 편의 제출로 당당히 신춘문예 당선 작가가 되는 거야

ㅍㅎㅎ'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가짢고 기가 찬 발상이고 착각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고 하였던가?


다음 해 1월 1일

나는 내가 제출한 그 신문을 사서 혹시 하는 마음에 당선자 명단을 보았다.


내 어쭙잖은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었고 내 무식한 생각은 딱 그날까지였다.


그해 당선자가 발표한 당선소감을 읽어보았다.

우선 그 당선자의 약력을, 그 당선자의 도전 횟수를 보고 그날 나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착하게 따르는 순한 학생이 되었다.

나 자신은 완전히 알게 되었다.

[ oo대학(서울 명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신춘문예 12번 도전에 당선 ]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잘해봤다.

나를 위로하고 달래어 보았지만 그날 내가 맞은 그 KO펀치는 너무나 강열하였다.


두 어달 글 쓰는 일을 쉬었다.

골프에 미쳐 지냈다.

한 달에 열 번을 넘게 라운드를 나갔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가정파탄을 걱정하였다.

그때 나의 모습은 필시 실연을 한 사람이 술집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형상과 거의 닮아 있었으리라.


한 달여의 나의 방황은 내가 우연히 보게 된 사이트 하나에서 멈출 수 있었다.

브런치스토리라는 사이트에서 에서 작가를 모집한다는 ~~


브런치?

이게 무슨 뜻이지?

혼밥을 하는 사람들끼리 점심을 같이 하자는 사이트인가?

뭐 뜻이야 어떻던 이곳이 글 쓰는 곳이고 작가를 모집한다고 하고 마침 나는 작가를 꿈꾸고 있는 사람이니 나의 망설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략적인 모집요강을 습득하고 첫 글을 제출해 보았다.

며칠 후 결과가 휴대폰으로 날아왔다.

채택되지 않았단다.


아무렇지 않았다.

브런치에 대한 호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첫 작품에 덜컥 채택이 되어 버리면 브런치라는 사이트가 너무 쉽게 보일 것이고 (아무나 제출만 하면 채택이 되나?) 첫 술에 배부를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체득하여 이미 알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불채택의 사유가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종열 님이 제출하신 글이 아직은 너무 적고 제한적이라 이종열 님의 성향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꾸준히 글을 제출하여서 표본의 양을 늘려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생각하였다.

물론 철저히 내 위주로, 철저히 아전인수의 이기적인 해석으로.......

'아!

내 글이 좋기는 한데 그것이 어쩌다 한번 좋았던 글인지, 정말 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으니 몇 번 더 제출해 보라는 뜻인가 보다'


스스로 착각이 아닌 척 착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였다.


일주일쯤 후에 다시 한 편의 글을 써서 제출을 해 보았다.

업무적인 일로 매일 은행에서 만났던 직원과, 퇴직 후에 업무적이지 않게 카페에서 한 달에 한번 만나 수다를 떠는 직원이 아닌 전우와의 이야기를 소재로 썼다.

'그때 그 사람들'이라 제목을 지었다.


이번에도 답변이 왔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중한 글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작가라는 호칭을 받아보았다.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기죽지 마라고 주변사람들이 해주었던 애칭 같은 작가가 아닌 공식적인 작가라는 호칭을 그날 처음 들었다.


그날의 기쁨은~~~~~~


초창기 나의 글에는 '라이킷'이 거의 없었다.

전무(全無) 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이 한 자릿수 라이킷이었고 그때의 나는 라이킷의 뜻도 몰랐다.

라이킷의 수는 의미조차 나에게는 없었다.


그저 썼다.

쓰다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한동안 쓰지 않았고 그때마다 브런치 시어머니의 독촉을 받았고 어이쿠 하는 마음에 다시 글을 쓰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렇게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2월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브런치에 글 하나를 올렸다.

친구들과 골프가 끝나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있었던 속상했던 일상의 이야기 하나를 썼다.

그 글 속에는 속이 많이 상했는지 내 좋지 않은 감정들이 군데군데 배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늘 20개 정도에 머물던 라이킷 수가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50개를 넘어 버렸다.

거기에다 지금껏 거의 없었던 댓글도 올라왔다.


이 무슨 시추에이션?

그날 나는 브런치에서 내 라이킷수가 너무 작아 기획적으로 수를 올려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할 만큼 어리둥절하였다.


오늘 올린 글과 그동안 내가 올렸던 글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왜 갑자기 라이킷수가 늘어나고 지금까지 없었던 댓글까지 등장을 하였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세히 다시 보았다.

지금껏 내가 썼던 글이 그저 고요하고 정(靜)하였다면 오늘 올린 글은 그에 비하면 조금 표현이 과격하였고 액션이 컸으며 동(動)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

글이 독자들에게 잘 읽히고 그들이 즐겨 찾게 하려면 글을 더 맵고 짜고 자극성 있게 쓰면 되는구나.

길을 가다가 1,000원을 주웠다고 쓰면 독자들 반응은 심드렁하고 1,000,000원을 주웠다 쓰면 독자들이 좋아하는구나'


이 생각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나는 길을 잃고 말았다.

내가 잃고 서 있었던 그 길에는 어둠이 가득 내려앉았고 설상가상으로 밤안개까지 내려앉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추위까지 엄습해 있었다.


그 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만히 서있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억지로 손을 더듬거려 앞으로 나아가다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천리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겠다는 두려움에 나는 그저 가만히 서있었다.


나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글인 소설을 브런치에서 쓰는 사람이 아닌 그저 내 하루의 일상, 내가 살아왔던 과게에 묻혀있는 추억을 소환해서 쓰는 작가인데 라이킷 수를 늘리고 구독자수를 늘리려 1,000원을 줍고도 1,000,000원을 주웠다 쓰고 양념으로 매운 청양고추를 쓰고 겨자를 넣고 후춧가루를 예사로 쓰는 것이 과연 맞는가?


불량작가와 비양심적인 셰프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적이지 않고 더 자극적인 말로 독자들을 속이는 불량작가와 음식의 맛을 조금 더 내기 위해 사람몸에 해로운 재료를 첨가해 파는 비양심적인 셰프는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이나 나는 그 길에 서있었다.

그때의 나는 브런치 시어머니가 글의 제출을 독촉하는 것을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두어 달 후쯤에 저편 산꼭대기 위로 희뿌연 해가 떠오르면서 내가 서있던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해가 뜨니 안개도 사라졌고 추위도 함께 사라졌다.


글을 쓴다는 것

나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미사여구(美辭麗句)의 말과 전문적인 어려운 말을 능수능란하게 글로 써서 독자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할 어휘력이 나에게 없다.

글의 앞과 뒤가 잘 구성되어 잘 차려진 임금님 수라상 같은 글을 쓸 능력도 나에게는 없다.


그러니 나는 이도저도 아니다.


그렇다고 글 쓰는 것을 중단할 용기도 나에게 없다.


'그래

그저 오늘 길을 가다 1,000원을 주웠다고 솔직히 쓰자.

맛은 좀 덜하더라도 평소에 쓰던 오이고추를 상에 올리고 싱거운 상추를 그 옆에 놓자'


브런치에서는 내 생활과 내 생각, 내 삶을 솔직하게 글로 남기자.

그러다가 후일 세월이 많이 흘러 내 글이 200편 정도 되었을 때 그때 나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기자.

그것이 지금껏 나의 삶이었으니.............


** 그래서 지금 저는 장편소설도 같이 쓰고 있답니다.

신춘문예지 등단의 꿈은 솔직히 현실성이 너무 없어서 포기하였고 문예지 등단을 목표로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쓰고 있지요.

그곳에서는 1,000원을 줍고도 1,000,000원을 주웠다고 쓰고 청양고추, 매운 후춧가루, 겨자를 팍팍 넣고 있답니다.

소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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