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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Oct 14. 2023

전학 가던 날

희한한 세상도 다 있었다.


아스팔트 위로 수십대의 차들이 이리저리 지그재그로 제 멋대로 달리고 그 차들 사이로 차보다 빠른 날쌘 빨간색 오토바이들이 비집고 다녔다.

**도시의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난생처음 본 나는 차들이 도로의 중앙선을 기준으로 정해진 대로 좌우로 다니는 줄을 그날은 몰랐었다.**


가게 어떤 곳에는 노란색 백열등 전깃불이 켜져 있었고 그 가게 방에는 테레비(TV)도 켜져 있었다.

조금 더 길을 가다 보니 책에서나 몇 번 보았던 눈이 세 개 달린 토째비(도깨비)같은 형상을 한 것이 길거리에 서서 빨간불을 켰다 파란불을 켰다 노란불을 켰다 하며 사람들을 가게도 하고 세우기도 하였다.

생모(生母)는 나에게 그것이 신호등이라 일러주셨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처음 보는 것 투성이었고 가끔씩 책에서나 멀리서 보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가까이에서 실제로 본 것이 처음인 것이 많았다.


그날 어린아이 걸음으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족히 1시간은 걸었을 것 같았다.


한 발을 걷고 오른쪽을 한번 보고 또 한 발을 걷고 왼쪽을 한번 보며 걷는 나를 생모는 학교에 늦겠다며 걸음을 재촉하셨지만 나는 난생처음 보는 것에 정신이 팔려  학교에 지각은 관심이 없었다.


국민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내가 자랐던 시골을 떠나 오늘 대구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온 것이었고 처음이라 생모가 학교에 따라 오셨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4살 생부(生父) 사촌형이신 양부(養父)의 집(큰집)으로 입양되었다.

집안의 종손이셨던 양부가 6.25 사변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 집의 代가 끊겼고 끊어진 代를 잇게 하려고 나를 양자로 보낸 것이었다.

태어나서 자란 4살까지의 대구생활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내가 양자로 간 큰집은 대구에서 꽤나 떨어진 산골 시골에 있었다.

마을 대부분의 집은 초가지붕이었고 도로는 전부 비포장도로였다.

당연히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골학교에서 5학년 여름방학을 마칠 때쯤에  

집안 종손인 나를 더이상 이런 시골에서 공부를 시킬 수 없다는 어른들의 뜻에 따라 국민학교 5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바로 이날 나는 처음으로 대도시의 신기루를 보게 된 것이었다.


늘 등하교 때 보였던 논에서 익어가던 나락(벼)과 밭에서 익어가던 콩 대신 오늘은 물건을 쌓아놓고 쭈욱 늘어선 상점들과 그 상점에 켜진 전깃불, 테레비들이 보였다.  

하루종일 있어도 두세 번 밖에 볼 수 없었던 차를 순식간에 수십대씩이나 볼 수 있는 횡재도 있었다.

시골에서는 바쁜 걸음으로 한 시간은 족히 가야 볼 수 있는 그나마 미닫이문으로 닫혀있는 텔레비전을 오늘은 내 눈 바로 앞에서 그것도 화면이 살아있는 날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태어나서 우물 안에서만 지냈던 개구리를 일순간에 서울도심에 내려놓으면 이런 마음일까?

학교 가는 길에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교문을 지나 운동장에 들어선 순간

나는 또 한 번 몸이 얼어붙었다.


ㄷ자 형태의 학교건물들이 운동장을 중심으로 3동이나 있었고 학교주위를 또 다른 빌딩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제까지 내가 다녔던 시골학교는 딱 1동의 건물만이 있었고 학교 뒤는 온통 높고 낮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는데ㆍㆍ


5학년 6반으로 배정받았다.

그날  같은 학년에 8반까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 내가 다녔던 시골학교는 한 학년이 2개 반으로만 되어 있었다 **


처음 본 키 작은 담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교실에 들어선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한 교실에 40여 명의 친구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남자친구들 대부분의 앞 머리카락이 눈썹까지 길러져 있었다.

피부는 하나같이 뽀얗고 예뻤다.


내 손이 머리로 올라갔다.

나는 빡빡머리에 거의 연탄배달을 하다 온 것 같은 새까만 피부였다.


"나는 영천 자양국민학교에서 전학 온 이종열이라 칸다.

우리 사이좋게 잘 지내제이~ "

어제 생부께서 일러주신 데로 인사를 간단히 하고 선생님이 가르치신 빈자리에 앉았다.


전학 와서 첫 수업이 산수시간이었다.

수업시간표를 몰라 교과서 전부를 넣은 책보자기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살짝 벌려져 있었다.


수업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내 귀에 잠시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딩동댕~~"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선생님은 책을 덮고 교무실로 가셨고 아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각자의 행동을 하였다.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알림 벨소리였다.


지금껏 그것의 소리를 '땡땡땡' 종소리로만 들었던 나는 그 소리에 잠깐 전쟁이 난 줄 알았다.

사실 조금은 놀랐지만 그 소리에 너무나 태연한 선생님과 반 친구들을 보고 전쟁은 아니구나 생각하였다.


쉬는 시간 내내 나는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완전히 얼어붙은 폭포수의 모습이었고 꿔다 놓은 보리자루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섦에 나보다 나아 보이는 모든 친구들이 나를 주눅 들게 하였고 나는 앉은자리에서 자꾸만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문제는 그다음 수업이 끝나고 딩동댕 소리가 들린 다음이었다.

가뜩이나 주눅 들고 땅속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내 주위로 우리 반 친구는 물론이고 옆반 친구들까지 몰려드는 것이 아닌가?


순간 서울대공원 창살에 갇혀 있는 원숭이가 생각났고 그 원숭이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들에 둘러싸인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얘들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지?

내가 촌놈이라 신고식을 치르려고 이러나?'


이미 내 머리에  자리 잡은 부끄러움과 주눅은 더 이상의 추측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날 똑같은 부끄러움과 주눅을 서너 번을 더 겪고서야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일각이 여삼추(一刻이 如三秋)라는 말은 꼭 이럴 때 써야 할 것이다.

긴 하루의 마지막을 울리는 딩동댕 소리를 듣고 책보자기에 책을 담아 정리하고 있을 때 미리 와 계셨던 생모가 교실로 들어오셨다.


선생님께서 나와 생모를 잠시 복도로 부르시더니 생모께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 종열이 어머님요.

오늘 이길로 시장에 가셔서 야 가방하고 운동화 한 켤레 사 신기~이소.

그라고 인자 머리도 쫌 기라도(길러도) 됩니더.

오늘 종열이가 하루종일 친구들한테 천으로 만든 책보자기하고 깜둥고무신, 빡빡 깎은 머리 때문에 놀림 마이 받았심니더 "

 

나는 그날 생모를 따라 시장으로 가서 태어나고 처음으로 책가방을 들어보았고 처음으로 끈이 달린 운동화를 신어보았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1년 반 동안 더 이상 머리를 빡빡 밀지도 않았다.


대구로 전학 온 다음날

나는 책가방을 들고

파란색 운동화를 신고

더 이상 어제처럼 달리는 차와 상점에 켜진 텔레비전을 신기한 듯 쳐다보지 않았다.


마치 대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아이들처럼 행동하였다.


그런데 여전히 내 머리는 빡빡머리였고 내 얼굴은 연탄과 같은 색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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