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 차를 가지고 싶었던 나는 6살의 나이였고 나락(벼)의 작황과 매상을 말씀하셨던 할배, 할매는 일흔의 나이를 넘으셨다.
백편(백슬기)과 송편을 실컷 먹고 싶었던 나는 6살의 나이였고 당장 오늘 저녁 끼니를 걱정하셨던 나의 어머니는 마흔의 나이를 넘으셨다.
벌써 1년을 넘게 신었는데도 하나도 해지지 않은 내가 신던 깜둥고무신을 거친 돌이 박박 문질러 새 신발을 바랐던 나는 6살의 나이였고 나보다 더 낡은 고무신을 3년이 넘게 신으시면서도 당신의 신발을 참으로 가지런히도 문지방에 정돈하셨던 내 고모는 서른이 훨씬 넘으셨다.
나와 식구들은 어느 것 하나 통하는 말이 없었고 나는 그저 밥을 다 지으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윗방에 계신 할배께 가서 문 앞에서 '할배요, 점심 잡수이소'라는 말만 하였다.
집에서 나는 늘 혼자였다.
식구들과 함께 있어도 나는 늘 외톨이였다.
내가 하는 말들은 거의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해서는 안될 말대꾸로 취급받았고 같은 말을 두 번 하면 이내 할배의 불호령과 마주해야 했다.
6살 적의 나는 말수가 적었다.
지금의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 5살 적에도 나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지 싶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는 느끼지 못하다가 그들과 헤어지고 돌아온 집에서 나는 자주 외로움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심심한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외로움이었다.
7살 적에도 나는 6살 때와 똑같이 외롭게 보냈다.
8살이 되던 해
드디어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왼쪽 가슴에 명찰을, 오른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입학한 학교에는 치도 대신 넓은 운동장이 있었고 같이 놀다가 시간이 되면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던 동네 아이들 대신 땡땡 치는 종소리에 같은 교실로 들어가는 학우들이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말대꾸로 치부하셨던 할배, 할매 대신 나에게 발표를 시키시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더 이상 나는 외롭지 않았다.
더 이상 나는 형제자매가 많은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다.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군대 6개월 <당시 독자(獨子)의 혜택으로 나는 방위병 6개월로 군복무를 마쳤다>
은행 35년
이렇게 거의 반백년 50년 동안 나는 외롭지 않았다.
아니 외로움의 단어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어쩌면 은행원 35년 동안은 사람들에 치여 사람을 피하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군을 제대하였다.
영원히 다닐 것만 같았던 천직 같았던 직장에서도 퇴직하였다.
퇴직 후 2년 정도는 내 하루일정이 참으로 편안하였다.
잠이 깬 새벽에 내가 퇴직을 하였고 더 이상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쾌재를 불렀다.
정해진 일정이 하나도 없는 하루가 참으로 행복하였다.
거기까지였다.
내 친구들 대부분은 아직 job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아직 돈을 벌어야 하고 어떤 이는 집에서 쉬는 것이 아직 익숙지 않아 일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용돈이라도 벌어볼 요량이라며 출근을 하고 있다.
지금의 나처럼 완전히 job을 놓고 백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어떤 이는 건강을 많이 잃어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하루
문득 반백년을 잊고 살았던 외로움의 망령이 스멀스멀 내게로 스며들었다.
이제는 알 수 있다.
지금 스멀거리며 또 내 곁을 서성이는 이런 것을 심심하다고 하지 않고 외롭다고 한다는 것을........
환갑을 넘긴 나에게 새삼 외로움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6살 때의 내가 몰랐던 것을 지금 60살의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나에게 찾아온 외로움은 같이 놀 친구가 없는 심심함이 아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말하지 못하였고 마주 서서 눈 한번 맞춘 적 없는 나와 만나라는 고독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껏 아주 잘 살아준 나를 안고 토닥이며 잘살았노라, 행복했노라, 감사했노라 말해주라는 위안의 시간임을 나는 알고 있다.
환갑을 넘긴 지금의 내 가슴에 하나도 자라지 않은 6살이 내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