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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Oct 09. 2023

환갑의 나이인 내 가슴에 6살 때의 내가 살고 있다.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길 하나가 나 있었다.

그 길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이 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지독하게 험한 비포장도로였다는 것과 내가 살던 마을을 지나 우체국과 면사무소, 지서, 학교가 있던 곳까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치도라 하였다.

차가 다니는 길이라 차도(車道)라 불러야 했지만 왜 치도라 했을지 모르겠지만 내 추측으로는 이가 다 빠진 나이 드신 노인의 입속에서 차도로 출발한 말이 빠진 잇속을 나오면서 치도로 변해졌을 거라 여겨본다.

 

어쨌든 그 치도에 실은 차가 그렇게 다니지는 않았다.

머리와 허리에 <삼천리 여객>이라 쓴 청색의 버스가 하루 세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였고 어쩌다 <公務>라 쓰인 검은색 지프차 한 두대가 치도 위를 달렸다.

그 지프차는 읍내에서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지서나 면사무소로 오갔고 그럴 때마다 뿌연 먼지가 지프차가 지나가고도 한참 동안 허공에 머물다 흩어졌다. 


그것보다는 소가 끄는 구루마(수레)들이 지나다녔는데 자주 구루마를 끄는 소는 콧구멍으로 하루의 고단함을 토해내곤 하였다.

 

한 여름 한 차례의 급작스런 소나기가 지나가고 햇볕이 치도에 가득 내려앉을 때는 물웅덩이 주위로 수십 마리의 호랑나비 떼들이 모여 앉아 날갯짓을 하였다.

그 옆으로 까불대는 종다리 한 마리가 내려앉았으나 이내 날아가 버린다.

 

치도에 일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살아있는 생명이라고는 호랑나비 떼가 전부였 호랑나비는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이 치도를 채웠는데  침묵과 적막이 꼭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 띠이잉~ '

적막과 고요가 무음의 소리를 내었다.


6살 적 나는 자주 이 치도에서 혼자 놀았다.

친구들이 자신들의 형제, 남매들끼리 집에서 놀고 쉴 때 나는 혼자 치도에 나왔다.

형제도 없었고 자매도 없었던 나는 자주 혼자 치도에 나와 호랑나비 떼 옆에 쭈그리고 앉아 신고 있던 타이어표 검정고무신을 구겨 자동차놀이를 하였다.


한 여름의 뙤약볕이 내 뒤통수에서 땀을 어지간히도 빼갔지만 나는 어른들만 있는 내 집보다는 차라리 호랑나비와 까불이 종달새가 있는 치도가 더 좋았다.


검둥고무신 차에 흙을 실어 물웅덩이를 건너면 잠을 자던 호랑나비 떼들은 일시에 날아올랐다가 내가 지나간 자리에 다시 내려앉아 다시 잠이 들었다.


6살이었던 그때 

나는 소리라고는 들리지 않던 그 비포장 치도에서 죽음과도 같은 침묵과 적막을 보고 느꼈다.

6살이었던 그때

나는 치도위에 잔뜩 내려앉았던 침묵과 적막이 그저 내 곁에 머무는 나와 이체(異體)가 아닌 동체(同體) 임을 알 수 있었다.


거의 90도로 꺾인 허리를 작대기에 기대며 나를 찾아 나선 할매의 부름에 돌아간 집에서도 나는 또 외로움을 보고 느껴야만 했다.


방금 나를 데리러 오신 허리가 다 구부러지고 다 빠지고 하나 남은 이를 가진 내 할매와, 부부의 연으로 만났지만 둘이 맞는 것이 하나도 없어 늘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며 다투며 사셨던 할배 

그리고 일찍 남편이신 아버지와 사별 후 자식인 나하나 믿고 모진 시집살이를 하며 살고 계셨던 내 어머니.

착했지만 몸에 장애가 있었던 내 고모가 살고 계셨던 집에서도 호랑나비 떼의 침묵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장난감 차를 가지고 싶었던 나는 6살의 나이였고 나락(벼)의 작황과 매상을 말씀하셨던 할배, 할매는 일흔의 나이를 넘으셨다.

백편(백슬기)과 송편을 실컷 먹고 싶었던 나는 6살의 나이였고 당장 오늘 저녁 끼니를 걱정하셨던 나의 어머니는 마흔의 나이를 넘으셨다.

벌써 1년을 넘게 신었는데도 하나도 해지지 않은 내가 신던 깜둥고무신을 거친 돌이 박박 문질러 새 신발을 바랐던 나는 6살의 나이였고 나보다 더 낡은 고무신을 3년이 넘게 신으시면서도 당신의 신발을 참으로 가지런히도 문지방에 정돈하셨던 내 고모는 서른이 훨씬 넘으셨다.


나와 식구들은 어느 것 하나 통하는 말이 없었고 나는 그저 밥을 다 지으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윗방에 계신 할배께 가서 문 앞에서 '할배요, 점심 잡수이소'라는 말만 하였다.


집에서 나는 늘 혼자였다.

식구들과 함께 있어도 나는 늘 외톨이였다.


내가 하는 말들은 거의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해서는 안될 말대꾸로 취급받았고 같은 말을 두 번 하면 이내 할배의 불호령과 마주해야 했다.


6살 적의 나는 말수가 적었다.

지금의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 5살 적에도 나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지 싶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는 느끼지 못하다가 그들과 헤어지고 돌아온 집에서 나는 자주 외로움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심심한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외로움이었다.


7살 적에도 나는 6살 때와 똑같이 외롭게 보냈다.


8살이 되던 해

드디어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왼쪽 가슴에 명찰을, 오른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입학한 학교에는 치도 대신 넓은 운동장이 있었고 같이 놀다가 시간이 되면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던 동네 아이들 대신 땡땡 치는 종소리에 같은 교실로 들어가는 학우들이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말대꾸로 치부하셨던 할배, 할매 대신 나에게 발표를 시키시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더 이상 나는 외롭지 않았다.

더 이상 나는 형제자매가 많은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다.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군대 6개월 <당시 독자(獨子)의 혜택으로 나는 방위병 6개월로 군복무를 마쳤다>

은행 35년


이렇게 거의 반백년 50년 동안 나는 외롭지 않았다.

아니 외로움의 단어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어쩌면 은행원 35년 동안은 사람들에 치여 사람을 피하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군을 제대하였다.

영원히 다닐 것만 같았던 천직 같았던 직장에서도 퇴직하였다.


퇴직 후 2년 정도는 내 하루일정이 참으로 편안하였다.

잠이 깬 새벽에 내가 퇴직을 하였고 더 이상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쾌재를 불렀다.

정해진 일정이 하나도 없는 하루가 참으로 행복하였다.


거기까지였다.


내 친구들 대부분은 아직 job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아직 돈을 벌어야 하고 어떤 이는 집에서 쉬는 것이 아직 익숙지 않아 일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용돈이라도 벌어볼 요량이라며 출근을 하고 있다.


지금의 나처럼 완전히 job을 놓고 백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어떤 이는 건강을 많이 잃어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하루

문득 반백년을 잊고 살았던 외로움의 망령이 스멀스멀 내게로 스며들었다.


이제는 알 수 있다.

지금 스멀거리며 또 내 곁을 서성이는 이런 것을 심심하다고 하지 않고 외롭다고 한다는 것을........


환갑을 넘긴 나에게 새삼 외로움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6살 때의 내가 몰랐던 것을 지금 60살의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나에게 찾아온 외로움은 같이 놀 친구가 없는 심심함이 아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말하지 못하였고 마주 서서 눈 한번 맞춘 적 없는 나와 만나라는 고독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껏 아주 잘 살아준 나를 안고 토닥이며 잘살았노라, 행복했노라, 감사했노라 말해주라는 위안의 시간임을 나는 알고 있다. 


환갑을 넘긴 지금의 내 가슴에 하나도 자라지 않은 6살이 내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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