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대장실 문을 매일 두드렸다. "중대장님, 이제 슬슬 차기 예초병을 뽑아야 합니다. 저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하지만 나도 중대장님께 물어보면서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남은 예초 기간이었다. 예초병은 여름에만 바싹 예초를 하고, 가을부터는 다시 본 보직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을부터는 날씨 때문에 풀이 잘 자라지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9월에 예초병을 뽑아도 새로 뽑힌 사람은 기껏 해야 1달만 할 수 있었다.
기존 예초병 선임들도 함께 중대장님께 찾아가 제안했다. 그리고 1달 동안 하는 대신 휴가를 챙겨주는 파격 조건을 달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운전병이었던 한 선임이 새롭게 뽑혔다. 남은 기간이 한달인만큼, 한 달 동안에는 2명에서 예초기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나는 정말 열심히 예초기를 돌렸다. 나름대로 예초 실력에 자부심이 생겼었고, 풀이 자라는 꼴을 못 보는 강박증이 생겼다.
어느덧 10월이 다가왔다. 단풍이 보이기 시작했고,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무성한 풀들은 선선한 바람과 함께 서서히 모습을 감춰갔다. 정든 예초기와 잠시 이별할 때가 왔다. 나는 작업복과 예초기를 잠시 창고에 넣어두고, 다시 군복을 입었다.
생각해보면 전입 후에 한 거라곤 예초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10월 달에 일꺽 (일병 5호봉)이 되었지만, 다시 내 주특기로 돌아왔을 때는 일이 다소 어렵게 느껴졌다. 내 보직은 편성 보급병인데, 말 그대로 창고병이었다. 드디어 입대 전부터 생각해왔던 창고병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예초만 하다가 창고병에 대한 생각과 기대감은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부대에 한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새 행정보급관, 일명 행보관님이 오신 것이다. 이전에 행보관으로 계시던 간부님은 잠깐 임시대리직으로 맡고 계셨고,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로 우리를 대해주셨다. 하지만 새로 오신 행보관님은 계급부터 남다르셨다. 브이자 3개 위에 별 하나, 원사였다. 군번은 93 년도 군번, 그러니까 군생활을 거의 30년 동안 하신 짬킹 중에서도 짬킹이셨다.
그를 처음 보는 순간, 짬으로 가득 찬 분위기와 그의 관상에 압도당했다. 짬에서 나오는 그의 성량은 작게 말해도 행정반 전체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가 한 마디를 하면 순식간에 3가지의 일이 생겼으며, 눈에 보이는 병사들은 갑자기 무슨 일이든 하고 있는 마법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임들은 행보관님을 매번 피하느라 바빴다. 게다가 다른 어떤 간부님들도 짬킹이신 우리 행보관님을 대적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행정보급관 (행보관) 님은 병사들에게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간부 top 3' 안에 속한다. 입대하기 전에 인터넷이나 군대를 다녀온 형들에게 행보관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접해왔다. 다들 행보관님을 최대한 피하라고 했다. 나는 새 행보관님을 경험하고 나니 그 말에 백 번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피하기는커녕 매일같이 그와 스릴 넘치는 일과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창고병, 그러니까 보급병 자리는.. 행보관님의 직속 계원이었기 때문이다. 행보관님은 새로 오시자마자 우리 부대 창고와 현황판과 각종 양식 등을 모두 바꾸고 싶어 하셨고, '굳이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은 것들을 전부 지시하셨다.
물론 그 일의 주인공은 나였다. 일을 하면서 처음엔 힘들었지만, 하다 보니 은근히 재미있는 구석도 있었고, 배울 수 있는 게 많았다. 업무량이 많은 만큼, 나는 빠른 기간 내에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창고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창고를 다녀온 뒤에는 문서 작성과 재고 조사를 하며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 몸에 이상한 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때라도 병원을 갔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