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정리
어느 순간부터 왼쪽 다리는 나에게 찌릿찌릿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그 신호는 내 몸에게 '일 좀 작작해 '라고 말하는 듯했다. 왼쪽 다리가 조금씩 저려오기 시작했으며, 전투화(군화)를 신고 걸어가면 남들보다 걸음이 뒤쳐졌다. 하지만 걸음이 느려지는 증상 외에는 딱히 별 다른 특별한 증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평상시대로 창고를 정리했다.
모든 병사들이 군대에서 아프면 바로 군 병원이나 의무대를 신청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군대에서 아프면 바로 병원을 가야 한다. 최대한 빨리 상관에게 보고해서 병원을 가서 진단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당시 일병이어서 눈치가 보였던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통증을 가볍게 여겨서 바로 병원을 가지 않았었다. 나는 살면서 감기가 걸렸던 적 외에는 딱히 아팠던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당시에 체력단련실에서 운동을 즐겨했었는데, 벤치프레스, 턱걸이와 같은 상체운동을 주로 했었다. 너무 상체운동만 하다 보니, 상체 하체의 운동 균형이 맞지 않아서 다리가 저렸다고 착각했다. 나는 내 몸이 보내는 그 신호를 하체부실이라고 판단했고, 이후부터 나는 하체운동에 내 열정을 열심히 불태웠다.
하체운동과 창고정리를 병행하면 하체에도 근육이 붙어 빨리 통증이 사라질 것이라 예상했다. 이 때라도 나는 눈치를 챘어야 했다.
2주 동안 부대에 있는 모든 창고와 공급실을 행보관님 스타일대로 싹 다 바꾸고, 자르고 붙이고 코팅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반복하며 바쁜 일과를 보냈다. 그렇게 모든 창고가 깔끔하게 변신했다. 그 제어 샤 나는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하지만 나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창고정리를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재고조사 기간이 다가온 것이다. 재고조사는 상급부대에서 우리 부대 내에 있는 모든 군수품, 군장 물품의 재고를 조사하고, 수량을 파악해서 보고해야 한다. 병사와 간부들의 군장 내 물품은 물론, 군생활하면서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물건들을 꺼내 고고 수량을 파악했다. 재고조사는 창고병에게 악몽 같은 존재다.
감찰을 받기 위해 창고 내에 있는 모든 물품들을 큰 공간에 사열(진열) 해야 한다. 그리고 개수를 파악해야 한다. 말이 쉬워 보이지만, 물품의 종류가 너무 많고, 기껏 실 셈을 한 후에 또 뭂품들이 발견되면 다시 수량을 수정하는 등 번거로운 일들이 많았다. 재고조사가 끝난 뒤에는, 애써 정리해 둔 창고가 다시 뒤죽박죽으로 변해있다.
행보관님께서는 이것만 끝나면 앞으로 좀 한가할 것이라고 하셨기에 꾸역꾸역 초과근무를 찍으며 했다. 고생 끝, 그렇게 재고조사가 무사히 끝났고, 홀가분했다. 행보관님도 만족하셨기에 더더욱 뿌듯했다. 고생한 나에게 보상하는 마음으로 그날 저녁은 오랜만에 px에서 냉동까지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내 몸은 그와 반대로 나를 욕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전투화를 신고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었다. 다리가 찌릿찌릿 저리는 걸 넘어 허리까지 고통이 전해져 오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이상했다. 10걸음 이상을 걷기가 힘들었다. 드디어 내 몸이 나를 포기한 것이다. 그렇게 내 몸을 나 스스로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은 후.. 그제야 군 병원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