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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고리즘 Oct 23. 2021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투자가 아닌 도박



부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다. 아무리 아파서 쉬는 거라지만, 다들 해야 하는 일과와 근무를 빠지고 생활관 한쪽에서 계속 누워있었으니 말이다. 몇몇 간부님들은 나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지만, 선임들은 그런 나를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불쌍하고 안타깝다고 해주셨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눈치를 너무 많이 봤다. 특히 내 직속 후임이 내가 해야 할 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2월이 왔다. 당직사관님께 보고하고, 동기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걸음씩 힘겹게 내디디며 위병소를 통과했다. 신병 휴가 땐 위병소가 마치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경계 같은 존재였고, 위병소를 통과하는 날만 기다리며 군 생활을 해왔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건강하잖아요!" 입대할 때 내가 부모님께 했던 말이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었기에, 더욱더 내가 다쳤다는 사실을 전해드릴 수가 없었다. 나 같아도 내 자식이 군대에서 다치면 화가 너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4급 판정을 받은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려드렸고, 내가 버스를 타고 다니기가 힘들어 아버지께서 데리러 와주셨다.



 아픈 내색을 안 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슬픔을 참고 계셨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아픈 내색을 안 하려고 최대한 노력해도, 걸음걸이에서부터 너무 티가 나 어쩔 수 없었다.  집에 도착 후, 다음날 바로 입원 절차를 밟고 난생 첫 환자복을 입어보았다. 여러 가지 치료와 주사 시술 등을 받으며, 한가하게만 흘러갈 줄 알았던 병원생활이 생각 외로 촉박하게 흘러갔다. 




난생처음 입원하는 내 모습에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했던 것일까? 환자복을 입은 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초라해 보였고, 자존감은 자존감대로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내가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전역하고 무슨 일을 하지? 앞으로 일은 할 수 있는 건가? 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찼다. SNS 속 친구들과 대학 동기들의 일상적인 생활, 여행,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들이 부럽게만 느껴지고, 억울하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매일 우울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건강한 하루를 보낸 적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들을 생각했다.



재활운동 누워만 있는지 어느덧 2달 가까이 되었고, 진통제를 꾸준히 복용하고 병원에서 시술을 받으며, 허리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문제는 시술과 약물 치료는 단지 '통증'만 가라앉혀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선 좋은 자세와 꾸준한 재활운동, 재활치료가 동반되어야 한다. 처음엔  자세를 5초도 유지하기 힘들었다. 지금 자세를 잘 잡고 있는지, 괜히 더 아파지는 것이 아닌지 의을 계속했지만, 안 하는 것 만 못하다고 생각해 매일매일 꾸준히 재활운동에 시간을 투자했다.




허리가 다친 뒤, 나는 내 미래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전역 후에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하며 돈을 모으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 몸뚱어리로 돈을 벌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만연했었다. 당시 코로나19로 인해 주식 열풍이 불고 있었고, 장이 좋은 날이 매우 많았다. 나 또한 시기가 맞아 그 열풍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20만 원 소액으로 주식을 하고 있었지만, 은행에 들려  월 40씩 들어가는 꾼 적금을 과감하게 깨고 주식에 넣었다. 



시장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나는 수익을 내고 싶다는 급한 마음으로 턱 대고 투자금을 늘리고, 단타 위주로 매매를 했다. 혼자 누워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주식 창을 계속 보게 됐다. 가격이 조금만 내려가도 안절부절못하고, 내가 팔면 오르고, 내가 사면 내리는 상황이 자꾸 발생했다. 스트레스를 더욱 받게 되었다. 매도 후 복구 심리 때문에, 시장이 끝난 후에도 오로지 주식 생각에 다른 들에 집중하기 힘들었으며, 다음 날 장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낮은 자존감을 탈출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조급하고 부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나 스스로 위기를 극복해 보겠다고 시작한 것이, 또 다른 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주식에서 많은 돈을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비트코인이 대세라고 해서 바로 비트코인 거래소에 가입하고, 주식과 비트코인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주식은 오전 9시에 열리고 15시 30분에 장이 마감된다. 그리고 주말에는 시장이 열리지 않는다. 반면에 비트코인은 주말, 시간 개념이 없었다. 24시간 연중무휴로 시장이 돌아간다. 당시 절제력이 부족하고, 무언가에 집중할 것도 없었던 나에게 비트코인 시장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참담했다. 돈을 따고, 잃고를 반복했다. 잃은 돈을 복구하기 위해 또다시 돈을 입금했다.



한 달 동안의 입원생활 중  내 정신은 더욱더 이상해져 갔다. 내 뇌는 마치 도박꾼의 뇌가 된 듯했고, 나는 투자라는 명목 하의 도박을 하고 있었다. 병원생활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당시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휴가가 통제된 상황이었지만, 나 혼자 병원을 다녀온 상태라 2주간 격리 기간을 가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 격리 기간 동안 격리 기간 동안 휴대폰 사용이 가능했었다. 나는 매일을 폐인처럼 보냈다. 정말 게임, 비트코인만 했으며, 2주 동안 나 혼자 아무런 시간 제약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부족했다. 그렇게 내 계좌는 너덜너덜 해져갈 때마다 내 자존감은 더 이상 낮아질 곳도 없어 보였다. 



친한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누구에게라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2시간의 긴 통화를 통해 비트코인을 끊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가진 돈을 몽땅 잃어버렸다. 주식과 비트코인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매일 지속되는 자기혐오와 자괴감, 후회 속에서 하루를 보냈어야 했다. 그리고 부대 내 사람들과 가족, 친구들에게는 멀쩡한 모습을 비추었다. 그 후엔 또다시 자괴감에 빠졌다. 결국 나는 육체적 , 정신적으로 모두 이상이 생겼다. 



격리 기간이 끝난 후에도 나는 비트코인에 매일 빠져있었다. 월급이 들어오면 바로 거래소에 입금했다. 그 모습을 본 동기들은 나를 걱정했고, 결국 동기들이 중대장님께 말씀드렸다. 나는 병영 상담관과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다. 



나는 하루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철조망으로 둘려 쌓인 공간 속에서 몸도 잘 움직이지 못하는 내 삶을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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