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고리즘 Oct 18. 2021

풀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중대장님 저는.. 그래도 취사병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풀 깎아라 "


중대장님께서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의외로 대화가 빨리 끝나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나는 당분간 총대신에 예초기를 들기로 했다.





우리 부대 예초병은 나를 포함해서 총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3명은 2019년도 2월, 3월 군번들. 나와 최소 1년 이상 짬 차이가 났다. 당시 그들의 계급은 모두 상병 말 (상병 6호봉)이었다. 다음 달이면 병장을 달고, 남은 군생활 일수가 세 자리에서 두 자리 수로 바뀌는 짬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내 군생활은 이제 막 500일이 깨졌던 참이었으니, 하늘과 땅 차이 수준으로 짬 차이가 심했다.



그래도 걱정되지 않았다. 나름 예초병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사 내 선임들도 모두 예초병이 취사병보다는 훨씬 낫다고 말했으며,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내 군생활 중 예초병으로서 시작하는 첫 일과시간이 다가왔다. 2020년도 5월이었다.



"아들~~"



19년도 3월 군번인 정 상병은 부대 내에서 꼬장이 심한 병사로 유명하다. 그는 내 이름 대신 아들이라는 호칭을 자주 썼다. 옛날부터 군대에서는 아버지 군번, 아들 군번이라는 단어가 전통처럼 쓰이고 있다. 자신의 군번과 딱 1년 차이가 나면 그 부대에서의 부자 관계가 형성된다. 정 상병은 아들 군번을 그토록 보고 싶었나 보다. "이제 집 갈날이 왔나 보다~ 아들 군번이 왔네.. 근데 너 며칠 남았냐?" 나는 정 상병이 전역하기 전까지 이 말을 100번 정도 들었다.



자기는 90일이 남았는데 집이 안 보인다며 신세한탄을 하곤 했다. 옆에 2월 군번인 강 상병, 서 상병은 그런 3월 군번인 정상병을 한 달 차이로 짬찌(짬 찌꺼기) 라며 매우 놀렸다. 물론 그 둘도 나에게 매일 집이 보이지 않는다며 놀렸다. 당연히 당시 군생활이 450일이 넘게 남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놀리는 데에 재미를 아주 제대로 들린 모양이었다. 



외진 창고에 기다란 예초기 두 대와 얼굴 보호대, 각반(무릎, 정강이 보호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마치 자연에서 태어난 듯 보이는 초록색 빛이 은은하게 맴도는 색깔이었다. "이게 바로 예초 에디션이야~" 강 상병이 웃으며 말했다. 예초를 많이 하다 보면 풀로 덮혀져서 아무리 청소를 해도 초록색을 없앨 수가 없었다. 마치 막막한 내 군생활 같았다. 아무리 시간이 가도 집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쨌든 그렇게 선임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장비를 착용해보았다. 전투복을 입고 방탄조끼를 입을 때보다, 각반과 얼굴 보호대, 예초기를 등에 매는 것이 당시 나에겐 훨씬 멋있게 느껴졌다. 아, 물론 예초기는 총보다 훨씬 무거웠지만.



우리 부대는 예초기가 2대뿐이라서 2인으로 교대하며 작업을 진행한다. 나는 주로 서상병과 함께 팀을 이루었는데, 선임 3명 중 가장 친절하고 동네 형 같았다.  "일단 너는 우리 하는 거 잘 보고 있어 짬쮜야." 강상병과 정상병으로 이루어진 팀이 예초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팽이가 돌아갔다. 



돌아가는 팽이를 보고 있자니 뭔가 선임들이 답답하기도 했다.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풀이 저렇게 느린 속도로 밀리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갖다 대면 밀리는 거 아닌가?' 라며 스스로 자만했다. 



나는 서상병에게 물었다. "원래 저렇게 오래 걸립니까?" 

서상병은 내게 말했다. "쉬워 보이지? 이따 해봐라" 



당시 나는 이등병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운동도 꾸준히 해왔던 나였었기에, 힘에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예초를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저 정도 양은 30분이면 다 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와 서상병의 차례가 왔다. 시동을 거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시동이 걸렸다. 달달달 떨리는 엔진 소리와 은은한 휘발유 냄새가 내 주변을 감쌌다. 천천히 강도를 올려보았다. 아까 봤을 때 들리던 소리보다 두 배 이상으로 큰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서상병이 말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일단 내 예초기의 시동을 끄고 자세를 알려주었다. 내가 생각하던 자세와는 전혀 다른 자세였다. 그렇게 알려준 자세를 익히고, 드디어 풀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던 예초기는 시동을 거니 훨씬 더 무겁게 느껴졌으며, 팽이를 갖다 대자 풀이 밀리기는커녕 돌만 튀겼다.



갑자기 마이크 타이슨의 말이 떠올랐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아아.. 타이슨 형님.. 지금이 그 순간인가 봅니다. 각반과 얼굴 보호대에 자갈과 돌이 튕튕 튀었다. 엔진 소리와 돌이 튀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가끔 벌이나 날파리들이 힘든 나를 위로해주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전혀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내가 작업한 범위는 서상병의 반절 수준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역시 짬은 짬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열심히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집을 가면 내가 우리 부대의 풀을 관리해야 한다. 나도 누군가를 알려주기 위해서는 열심히 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풀의 사나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전 01화 풀 깎을래? vs 밥 지을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