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10 바다를 마주한 미션

충남 타임스퀘어



드디어 건넜다.


시장 입장.

이곳은 단순한 장보기가 아니라

개인 자산의 발굴지이자,

자존심의 검증소.


첫 종목은 무말랭이였다.

노점에 다가가자,

할머니가 말했다.


"무말랭이 찾어?"


은하가 대답했다.

"네, 있는 대로요."

('있는 대로'에는 현실과 감정 모두가 포함돼 있다.)


할머니는 봉지를 건넸다.

"이거 김장 때 말린 거여.

어짜피 다시 불려야 쓰니께,

시차는 의미 읍지."



은하는 봉지를 들여다봤다.



'이 무말랭이, 나랑 닮았네..

겉으론 다 말라붙었는데

속은 아직...

기운이 남았어. 아주 미세하게.'



다음은 고춧가루.

은하는 조심스레 물었다.

"중국산 아니죠?"


"아녀, 우리나라 거여~"


"그... 혹시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요..?"


할머니가 째려봤다.


은하는 입을 다물고 속으로만 말했다.

'고춧가루도 원산지에 민감한 시대니까요.'




고춧가루 7천 원, 표고버섯 2천 원,

무말랭이... 프라이스리스.

계산은 현금.

이 동네엔 간편 결제가 없다.

감정도, 지불도, 모두 수기로 진행된다.



물건을 다 사고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며

은하는 생각했다.


'끝났다. 장보기 퀘스트 완료.

이제 진짜 집에 가야 한다.

진짜 현실이 시작된다.'



장바구니는 손가락 신경을 하나씩 끊고 있었고,

은하는 버스정류장으로 비틀비틀 걸었다.

... 다음 스테이지는 '충남타임스퀘어 돌파전'.



버스가 도착했다.

은하는 무표정하게 올라탔다.

자리에 앉았지만,

마음은 아직 버스 밖 어딘가에 서성였다.

멍한 채로 창밖만 보고 있는데,

어느새 도착벨이 울렸다.


문이 열리고

은하는 천천히 내렸다.

문제의 사거리.

마을 전체 인구가 무조건 지나가는

시선 교차로의 성지.



이 동네에선

횡단보도 건너는 게 SNS 피드 전체공개급이다.

누가 무엇을 입었고,

어디서 무얼 샀고,

얼굴빛은 어떤지,

모두가 실시간 구독 중이다.



그날 은하의 복장은 다음과 같았다.



상하 유기농 방수복 세트

'락락락 CEO'라 적힌 모자

생협 장바구니

감정 약간 눅눅함



초록불이 켜졌다.

은하는 첫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정지선에 선 차량 내부의 시선들이

레이저처럼 꽂혔다.



"어이구~ 바지락 사장님 지나가시네~"

어느 차 안의 중년 여성 운전자.

입 모양만 봐도 읽혔다.

(은하는 환청이라고 우겼지만,

그 입술은 너무 정확했다.)




횡단보도 중간.

택시 한 대가 커브를 틀며 슬쩍 멈췄고,

운전석에서 기사님이 은하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건 인사였을까,

아니면... '응, 너 알고 있음'의 표시였을까?


은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다 끝났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진짜 마지막 미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하의 마지막 관문은 늘 같았다.

바로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한 사람과의 조우.



왕언니.

우리 동네 스핑크스.



그녀는 늘 거기 있다.

계절도, 시간도, 감정도 통과해야

그 의자 옆을 지나갈 수 있다.


말은 짧고, 질문은 없다.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정확히 너의 '오늘'을 찔러버린다.




오늘의 문장.


"거 참, 옷 입는 거 보면 맘이 안 편혀."


은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정답이 없어.

설명도 안 돼.

해명은, 의미 없다.


그건 스핑크스가 내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이미 정답이 내 안에 있다는 전제를 가진 통보.


은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은 못 했다.

왕언니의 위력은 대기권 돌파급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말이 없었다.

슈퍼 앞 의자에 앉은 채,

다음 대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은하는 조용히 옆을 지나쳤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이미 감정청산보고서는 접수된 느낌이었다.




이 동네에서 외출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감정의 입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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