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브랜드화 한 피터 마리노의 정체성
가죽 바지에 가죽 재킷, 가죽 부츠, 가죽 모자와 장갑, 커다란 은목걸이, 은반지 그리고 검은 선글라스.
무슨 영화 속 불량배 캐릭터 인가 싶겠지만 이것은 나의 오랜 스승이자 보스 피터 마리노의 '데일리룩'이다.
LVMH 그룹의 모든 럭셔리 매장을 디자인하는 세계적인 실내 건축가인 그의 룩은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수년간 단정한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고수했던 그가 이런 가죽 마니아 캐릭터로 변장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앤디 워홀의 친구였기에 그가 은색 가발을 페르소나로 쓴 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수도 있겠고 칼 라거펠트가 자신을 아이콘화 한 데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상업공간 디자인은 피터 마리노에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수년간에 걸친 럭셔리 브랜드 작업을 통하여 성공적인 리테일 공간의 비법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각각의 브랜드에 마법 같은 공식들을 적용시키며 샤넬은 샤넬답게 루이비통은 비통답게 수많은 브랜드들을 제 각각의 글로벌 콘셉트를 디벨롭하며 각기 다른 지역에 적용하는데 한 사람의 스튜디오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는 다양성과 창의성은 대단하다. 물론 모든 디자인이 그의 머릿속에서 탄생하진 않는다. 각 브랜드마다 적임자를 두어 리드를 맡긴다. 나는 그의 밑에서 시절 셀린느, 랑콤, 겔랑, 제냐 등을 맡은 책임 디자이너였고 수많은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 개성과 아이덴티티를 공간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나와 내 팀원들이 성공적으로 콘셉트를 디벨롭할 수 있던 건 거시적인 안목으로 브랜드 만의 차별화된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 내는 피터의 능력이었다고 하겠다.
그의 탁월한 브랜딩 능력은 비단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철저한 퍼스널 브랜딩으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는 드물게 아이콘이 되었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디자인 능력도 능력이지만 자기 관리의 신이었다. 그를 떠올리면 Badass라는 단어가 생각나는데 직역하자면 간지남 정도 되겠다. 백발인 그이지만 나는 그가 애지중지 하는 턱수염이나 머리에 새치 한번 본 적 없고 70이 넘는 나이에도 헬스를 하며 오토바이를 탄다. 보기만 해도 땀띠가 차오를 것 같은 그의 가죽 유니폼은 잘 때도 벗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정도로 365일 똑같은 스타일로 출퇴근한다. 몇 년 전 동행한 파리행 비행기에서 8시간 동안 불편한 가죽옷을 왜 갈아입지 않냐고 묻는 내게 그는 말했다. "Cause I am peter marino" (나는 피터 마리노 니까..) 비행기가 떨어지자마자 미팅으로 직행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난 그 가죽옷이 의미하는 것을 알았다. 그 가죽 유니폼은 그에게 전쟁터에 나가는 갑옷이었으며 그는 항상 중무장 상태를 유지한 자기의 아이덴티티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미지가 중요시되는 이 시대에 그는 진작부터 자신을 하나의 캐릭터로 재탄생시키는 전략으로 자기만의 가치관과 신념을 표현해나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명품 브랜드들과 동일시되도록 뛰어난 능력과 그를 부곽 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로 무장하여 자신을 명품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토록 그가 일관성을 유지하며 그의 캐릭터에 충실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신념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아닐까 싶다. 자신을 하나의 캐릭터로 재 탄생시키기까지 그는 자기만의 가치관과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자는 상대가 누구든지 절대 용납하지 않는걸 나는 수도 없이 봐왔다. 일을 잘 못하는 직원들에게 쌍욕을 퍼붓기도 하지만 효율성이 좋은 직원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던 그.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에서 어수룩한 말투로 상대방의 방어벽을 허물어 놓고는 상어의 이빨같이 날카로운 설득으로 허를 찌르는 가죽 갑옷을 입은 기사 같았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가죽 유니폼이 중세시대 기사들이 착용한 갑옷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 적이 있다.)
세상에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대중에게 독창적인 이미지 아이콘으로 인식화시킨 디자이너는 피터가 유일무이하다.
얼마 전 루이비통에서 피터가 디자인한 핸드백을 출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구는 물론이고 현대 회화 작품에서 이제는 패션디자인에도 진출한 그. 그의 아이덴티티가 대중에게도 확실하게 자리매김했음을, 디자이너로써 브랜드 가치가 월등히 승격한 것이다 하겠다.
높은 굽의 가죽 부츠에 뻣뻣한 가죽 팬츠 덕에 뒤뚱거리며 걸어오던 피터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뒤뚱거림은 그의 무장 전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누구보다 날카롭고 냉철한 본능을 숨기기 위한 무장 술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