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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화 Sep 21. 2022

    안녕하신지요


  ‘시계는 멈출 수 있지만 시간은 멈출 수 없다.’는 말은 식상하다. 기억 속의 시간은 멈추었다. 지금 내 나이는 그 시절 선생님의 나이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그분을 생각하면 나는 마냥 서른다섯이다. 차 한 잔의 여유로 멈춰버린 시간 여행을 한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들 첫 담임은 나이가 지긋한 여선생님이었다. 선생님 면담 가던 날. 꽃다발을 만들어 손잡이에 돈이 든 편지봉투를 돌돌 말았다. 내가 꽃집을 할 때 엄마들이 꽃다발을 주문하여 손잡이에 돈 봉투 감는 것을 보고 속으로 흉을 보았었다. 그런 내가 이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 부끄러워 직접 손에 쥐어드리지도 못했다. 교탁 위에 올려놓고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왔다.

  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내 가슴에 보이지 않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갔다. 촌지 덕분인지 몸이 불편한 아들을 친구들과 잘 사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선생님은 과자나 빵이 생기면 퇴근길에 주고 가셨다. 어떤 때는 고기도 사 오셨다.

“집에서는 민수 엄마가 엄마, 학교에서는 내가 엄마다.”

깊은 정을 주셨다. 다른 아이들은 건강하니까 부모님들이 학교에 자주 오지 않는다. 아들의 등하교 길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1학년을 마칠 때쯤 선생님은 ‘굴렁쇠’라는 일기문 집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표지를 넘기면 첫 장에는 받는 아이의 일기 글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 손에 저금통장들이 쥐어졌다. 열어보니 내가 꽃다발 속에 말아 상납한 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또 한 번 부끄러웠다. 선생님이 다가오셔서 내 손을 잡았다. 처음 받을 때 돌려드리면, 또 다른 일을 도모할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민수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가진 첫 통장이다. 이 사건으로 내 사전에서는 ‘촌지’라는 말이 영원히 사라졌다.

  그 이후로도 가끔 간식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선생님은 아들의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의 선생님이었다. 딸아이 진로도 상담해 주시고, 나와 차도 한잔하며 서로의 아픈 사연도 나누게 되었다. 오랜만에 오신 선생님은 커다란 액자를 옆구리에 끼고, 가슴에는 작은 강아지를 안고 오셨다. 이사 가신다고 했다. 민수가 몸이 불편하여 밖에 잘 나가 놀지 못하니 친구 삼으라고 주고 가셨다. 항상 웃는 모습에 당신이 더 천사이면서 나보고 얼굴이 밝다고 천사엄마라고 하신 분. 힘내라고 언니처럼, 친정엄마처럼 파이팅을 외치시던 분.

  이 글을 쓰다 말고 그림을 쳐다본다. 높은 산 위에 밝은 빛이 쏟아지는 시원한 그림. 선생님의 오랜 제자가 화가가 되어 그린 작품이다. 그 제자가 선생님께 고마움을 표시했고, 선생님은 나에게 사랑으로 전하셨다. 저 빛이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나를 믿어주고 끌어 주시던 분. 살아가는 동안 잠시 만난 분이지만 꽃을 보면 꽃 같은 선생님이 떠오른다.

  교권이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로 묻혀간다. 언론에서 자주 접하는 교사와 학생 간의 사건들. 학부모의 과잉보호로 사랑의 매를 들어볼 수도 없는 현실. 이제 사랑의 매는 없다. 작은 체벌에도 학부모는 교무실로 찾아간다. 스승이 제자 앞에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젊은 학생들은 선생님을 학원 강사 다음으로 착각하고 산다.

  딸아이가 선생님처럼 되어서 교사의 길을 가고 있다. 이 험난한 교육의 지뢰밭에서 내가 생각하는 꽃 같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지금도 어디에선가 사랑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곁에는 없어도 언제나 내 가슴속에 계시는 분. 잊고 살다가 오늘처럼 추억 속에서 수시로 불쑥 나타난다. 아마 평생을 나의 버팀목으로 남고 싶으신 모양이다. 예전처럼 익숙한 몸짓으로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의 안녕을 차 한 잔에 우려 마시고 싶다. 그날을 기다리며 내 안에 계신 선생님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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