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60대 부부 여행기
*2024.06.08.(토)
아마게르 바닷가에서 보낸 시간이 퍽 좋았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남편과 가끔 그 바다 이야기를 했다. 그날 그 시간 우리의 마음과 고요하게 일치를 이룬 까닭일 것이다. 깊고 잔잔했던 교감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덴마크 국민 빵집이라는 락케에후세가 숙소 근처에 있어 페이스트리를 몇 개 사 와서 아침으로 커피와 함께 먹었다. 국내에서는 흔히 페이스트리를 대니쉬빵이라고 할 만큼 덴마크는 페이스트리의 천국이라고 한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니 어린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6월 중순을 향해 가고 있음에도 날은 여전히 쌀쌀했다.
한때 국내에 휘게 바람이 불었던 때가 있었다.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집에는 루이스폴센 조명이 필수처럼 보였다. 레고야 말할 것도 없고 로얄코펜하겐, 자라도 꽤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덴마크 하면 단연 안데르센이 으뜸일 것이다. 성장기를 보내며 그의 작품 하나쯤 읽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특히 <인어공주>는 현재에도 다양한 장르를 통해 변함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코펜하겐을 생각하면 화가이자 세계 최초의 트랜스젠더였던 릴리 엘베를 그린 영화 <대니쉬 걸>의 한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앞 부두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활기 차고 번화한 느낌을 주던 19세기말 코펜하겐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 촬영 장소가 바로 코펜하겐의 뉘하운이라는 것을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카스텔레 요새가 있는 역으로 가서 뉘하운을 비롯해 도시 속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카스텔레 요새가 있는 외스터포트역으로 가기 위해 환승을 하려다 그만 아차 하는 순간에 남편과 헤어지고 말았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벽에 붙은 노선도를 한 번 더 확인하려고 주춤하는 사이 남편은 탑승했고 그대로 문이 닫혀 버린 것이다.
뒤돌아 보는 남편과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고 남편이 나를 불렀는지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밖에 서 있던 내게 쏠렸다. 우리는 재빠르게 다음 정거장에서 만나자는 사인을 주고받았다. 그제야 그들도 우리의 사인을 이해했는지 웃었고 남편도 그들과 함께 웃는 모습이 보였다. 객차 안의 분위기가 사뭇 훈훈해 보였다.
남편과 다시 만나 한바탕 웃고 나서 카스텔레 요새로 향했다. 구글 지도에서 보면 카스텔레 요새는 별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꼭짓점들은 외곽을 감시하는 치성 역할을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요새는 해자를 두르고 있어 다리를 건너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토성처럼 보였다. 몽촌토성의 미니미랄까.
요새에서 나와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니 바로 바다였다. 바다와 만나는 길 목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단번에 인어공주 동상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25m 높이의 아담한 인어공주 동상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수줍은 듯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듣던 대로 동상은 작고 소박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친근함을 주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싶다.
인어공주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게피온 분수가 있었는데 게피온 분수를 보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반응했다. 풍요의 신 게피온과 그녀의 아들들이 변신한 소 네 마리가 그녀가 올라 탄 수레를 힘차게 끌고 있었다. 게피온이 휘두르는 채찍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힘차게 내닫는 네 마리 소의 코에서는 하얗게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었다. 코펜하겐이 있는 셸란섬에 대한 전설을 모티브로 한 이 조형물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한 강렬한 역동성을 뿜어 내고 있었다.
덴마크 여왕의 거주지인 아말리엔 보리 궁전 앞에는 근위병교대식이 한창인 가운데 궁전 옆 도로 안으로 바티칸을 연상시키는 프레데릭 교회의 돔이 보였다.
길은 뉘하운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운하라는 뜻의 뉘하운은 그 의미가 무색하게 17세기에 건설된 항구다. 당시 뉘하운에는 수많은 화물선과 어선이 드나들었고, 그러다 보니 고단한 어부들의 삶이 녹아들며 뉘하운 일대는 술과 매춘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영화 <대니쉬 걸>에서 보았던 장면의 실사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형형색색의 외벽을 지닌 오래된 건물들이 빈틈없이 붙어 도열해 있고 운하에는 오래전 전쟁에 사용했던 배들까지 전시되어 있어 과거로 순간이동한 듯했다. 영화에서 보았던 19세기말의 뉘하운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뉘하운에서 모이기로 한 것일까. 사람들은 밀물처럼 뉘하운으로 들어왔다. 이곳 뉘하운에서 안데르센은 20년 동안 거주하며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곳 중 하나인 안데르센의 집은 뉘하운과 바로 붙어 있었는데 수리 중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이 집에서 그는 1835년 그의 첫 동화집을 출간했다.
뉘하운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브랜드 매장들이 즐비한 스트로이에트 거리로 나왔다. 거리 곳곳에서 버스킹이 한창이었다. 그러다 건널목 광고판에 배우 매즈 미켈슨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 나 코펜하겐에 있는 것 맞구나.
오후의 피로도 다독일 겸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했다. 카페 창밖으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고 갔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라운드타워를 지나 로젠보르크성에 들어가니 입장료도 없었는데 화장실도 무료네. 럭키!
다시 스트로이에트 거리로 돌아와 걷다가 뜬금없이 도로 한가운데 있는 작은 지하도를 발견했다. 입구가 좁고 달리 표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지하철역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지하쇼핑몰은 더더욱 아닐 텐데 연신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공중화장실. 이런 반전이라니. 게다가 고색창연? 하기까지.
스트로이에트 거리 앞을 흐르는 운하를 건너면 도심 속 작은 섬인 슬로츠홀멘 위에 세워진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이 있다. 왕실 거주지였던 궁전은 현재 국회, 대법원, 총리실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왕실 거주지였던 궁전에 삼권이 모두 모여 있다니 묘하고 재밌는 발상으로 느껴졌다.
숙소로 돌아와 스톡홀름에서 구입했던 떡볶이를 안주 삼아 맥주를 한 잔 했다. 창밖에는 낮에 잠시 흩날렸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