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실연의 묘약 있어요. 탈린

에스토니아-60대 부부 여행기

by 나무

*2024.06.10.(월)


탈린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있다. 약국에는 실연의 아픔을 치료하는 약이 있다고 했다. 1422년에 문을 열어 현재도 운영 중인 시청약국은 올드타운의 중심인 라에코야 광장 한쪽에 있었다. 실연의 묘약이라.. 쥐고만 있어도 나을 것 같은 든든한 위로가 느껴졌다. 플라시보 효과도 있지 않을까.


약국의 유리장 안에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는데 물고기의 눈, 박쥐의 혀, 뱀의 이빨 등 상상을 초월하는 약재들을 사용한다고 가이드북은 적고 있다.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올드타운의 성벽에는 6개의 문이 있고 그중 하나인 비루게이트를 보통 올드타운의 출발점으로 잡는다. 어제 오후 설렁설렁 걸었던 올드타운을 제대로 보기 위해 비루게이트를 향해 걷다가 새 모양을 한 커다란 돌들과 마주쳤다.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해 세워 둔 돌이었는데 작은 것에도 마음을 담은 디자인이 훈훈해 보였다.



비루게이트로 들어가 성벽을 따라 걸었다. 오전 11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거리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했다. 에스토니아는 13세기에 덴마크의 공격을 받으면서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 그 이전까지는 국가가 아닌 지역공동체 같은 마을 형태로 있었다는 의미다. 그 이후부터 에스토니아는 덴마크, 스웨덴, 독일,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으로 숨 가쁘고 가파른 역사의 길을 걷게 된다.


비루게이트

성벽을 따라 조금 걸으니 보루를 통해 성벽 위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보루 안으로 들어섰다. 돌로 쌓아 올린 성벽은 단단해 보였다. 촛불을 밝혀 둔 돌계단을 조심조심 오르자 여러 장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작은 공간이 나왔다. 약 1세기 전의 탈린과 현재를 비교한 사진들이었는데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니 발트해 지역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성벽에 오르니 고운 오렌지색 지붕들과 푸른 하늘, 그리고 길게 이어진 성벽의 지붕 너머로 15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는 159m의 울라프교회가 보였다.


성벽 아래 나란히 서 있는 건물의 아치형 통로 너머로 좁은 골목이 이어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묘한 분위기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구글맵을 열어 위치를 확인하니 카타리나 거리의 시작점이다. 아하, 마침 가려던 곳이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안에는 수 세기 전에 지어진 중세의 건물들이 터를 지키고 있었다. 골목의 한쪽 벽을 이루고 있는 도미니카 수도원의 돌담과 건물을 이어주는 독특한 아치들은 지붕의 들보처럼 실내같은 아늑함을 느끼게 했다. 시간을 되감아 중세의 시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 골목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대단했다. 중세 때에는 이 카타리나 골목을 따라 장인들의 작업장이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골목을 나와 라에코야 광장을 지나 160년 가까이 되었다는 카페 <마이아스모크> 찾았다. 카페의 벽면에는 1864년부터의 역사가 사진과 함께 붙어 있었다. 엔틱 한 무드의 내부가 편안하고 흡족했다. 화장실조차 어찌나 근사하던지. 남편이 좋아하는 티라미수 케이크 한 조각과 달콤한 크림이 올라간 패스트리를 주문해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었다.



카페에 들어설 때 보니 바로 앞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 입구는 온통 우크라이나 전쟁을 규탄하는 유인물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한때 소련의 일부였던 에스토니아는 현재도 인구의 약 20%가 러시아계 사람들이다.


러시아 대사관 앞

올드타운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살았던 고지대의 톰페아와 평민들이 살았던 아랫마을인 알린이다. 톰페아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 길고 경사가 완만한 길은 귀족들이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녔던 길이고, 짧고 경사진 길로는 평민들이 다녔다고 한다. 올라갈 때는 경사진 길로, 내려올 때는 완만한 길을 걸었다.

톰페아 가는 길. 위는 평민들이 아래는 귀족들이 이용했던 길

톰페아에 들어서면 거대한 성당이 우뚝 막아선다. 러시아 정교회의 알렌산더 네프스키성당이다. 맞은편에는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톰페아성이 있었다.



막상 고지대인 톰페아에 오르니 길은 평탄했다. 지형 자체가 분지였던 모양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교회이자 주교좌 성당이었던 성 마리아 교회의 첨탑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주교의 정원인 비솝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박해 보이는 교회의 외관이 퍽 마음에 들었다. 현재는 루터교 소속인 교회의 내부를 보고 싶었으나 입장료를 관리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개방되어 있는 비솝정원으로 들어가 정원에 잠시 머물렀다.

성 마리아 교회와 비솝정원

소박한 비솝 정원은 발트해를 향해 열려 있었다. 정원에서 느껴지는 고요와 적적함이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이럴 때면 가끔 마음의 빗장이 풀리며 아득한 기분이 들 곤 한다.


파트쿨리 전망대

다정하고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이어졌다. 톰페아에 있는 두 곳의 전망대 중 파트쿨리 전망대를 지나 고투오차 전망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의 북적임을 볼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보는 올드타운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오렌지색 지붕들 너머로 풍경을 수평으로 가르고 있는 푸른 발트해가 보였다. 규모는 작아도 두브로브니크의 올드타운이나 체스키 크룸로프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탈린.


고투오차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

톰페아에서 내려와 레스토랑 <올데 한사>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라에코야 광장 옆에 있는 <올데 한사>는 중세시대를 그대로 재현한 식당으로 꽤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이 지역에 인싸랄까.


올데 한사의 세면대

대부분의 조명을 촛불에 의지하고 있는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이 막아섰다. 잠시 후 어둠에 익숙해진 후에야 찬찬히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식당 내부와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서 언뜻 베르메르의 작품이 보이는 듯해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어리둥절 서 있으니 중세 복장을 한 여성이 다가와 자리를 안내했다. 허니비어(꿀맥주)를 주문하고 메뉴판을 펼쳤는데.. 당최 뭐가 뭔지 빼곡하게 적혀 있는 메뉴를 어둑한 불빛으로는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고민 없이 중세 때 먹었다는 메뉴를 주문하고 허니비어로 목을 축였다. 커다란 도기잔에 담긴 달콤한 맥주가 목젖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하.. 이런 맛을 무맛이라고 하던가. 하기야 중세 때 식사라는 게 자극적이거나 특별할리 없을 테지. 대신 혀에 감기는 허니비어 한 잔씩을 추가했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그새 거리는 빗물에 젖어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한차례 비가 쏟아졌던 모양이다. 맥주 두 잔의 취기가 올라왔다. 취기는 때로 웃음을 유발하고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는 효과도 있는 법. 15세기에 가장 높았다는 159m의 울라프 교회를 향해 남편과 힘차게 걸었다.


울라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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