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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Dec 26. 2023

어떤 하루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발견했던...

 대학교 때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게 되면서 독립을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내가 지냈던, 내 방은 이제 더는 내 것이 아니었다. 집엔 두 달에 한 번쯤 내려갔다. 그때마다 내 물건은 하나씩 없어졌다. 필기도구, 책꽂이, 심지어 침대까지. 그 공간은 조금씩 엄마의 물건으로 채워졌다. 엄마의 펜과 연필, 엄마의 책과 공책. 이제 그곳은 엄마 방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다. 

 

 몇 달만에 고향 집에 내려간 날이었다. 방에서 몇 권 남지 않은 내 책을 찾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엄마의 노트가 보였다. 아주 두꺼운 노트였다. 

‘엄마는 도대체 무엇을 적으려고 이 두꺼운 노트를 샀을까?’ 

호기심을 견디지 못해 펼쳐보았다. 가운데 부분은 텅 비어있었다. 

'뭐야, 이럴거면 굳이 이렇게 두꺼운 노트를...' 

천천히 노트를 앞으로 넘기자 드디어 엄마의 글씨가 나왔다.  

‘바나나: 아침에 먹으면 소화 기관에 좋음’

이런 식의 건강 정보가 적혀있었다. 맞아.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TV에서 좋은 음식이 소개되면 저렇게 적어두곤 했지...

쭉 훑어보다가 마지막 첫 장을 발견했다.  

1. 우리 가족과 함께 해외 여행가기 
2. 가족사진 찍기(아들, 아빠는 턱시도 / 누나, 엄마는 드레스)’. 

엄마의 버킷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눈물이 났다. 왜 눈물이 났는지는 모른다. 아마 얼마 전에 봤던 슬픈 영화가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엄마도 우리와 함께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는 것을, 다 큰 어른이 되서야 깨달았다는 사실에,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서, 슬퍼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슬픈 영화를 봐도 나는 잘 울지 않는데, 아주 슬픈 영화였나보다. 그 영화의 제목도, 내용도 기억이 나진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제목도, 내용도 기억이 안 나는 슬픈 영화 때문에 다시 눈물이 나려고 한다.

 

 슬픈 영화 생각을 잠시 멈추고, 누군가 들어오면 굉장히 민망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두 달에 한 번씩 오는 아들이 방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그것을 본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거울을 보니 눈물 자국이 남아있다. 눈치 빠른 엄마에겐 이런 작은 흔적조차 남기면 안된다. 재빠르게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세수를 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말끔한 정신으로 다시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생각해봤다. 그리고 우리 집에 있는 가족사진을 한 번 봤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찍은 사진이었다. 가족사진을 찍으려 옷을 사러 갔던 기억이 생생하지만, 참 오래되긴 했다.  


엄마는 아직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다. 태국, 인도, 미국 등 셀 수 없이 많이 여행을 다니면서, 왜 나는 한 번도 엄마와 함께 여행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을까... 엄마도 좋은 곳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을거란 생각을. 왜. 단 한번도. 하지. 못했을까...

 

 까짓것 엄마의 소원을 하나씩 이뤄드리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전역하면 다낭을 함께 가자고 했던 약속은 코로나19탓에 취소되었고, SNS에 무료로 가족사진을 찍어준다는 허위 광고에 당할 뻔한 뒤, 아직도 가족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다. 그 날의 몰래 훔쳐본 엄마의 버킷리스트는 아직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하루 빨리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이뤄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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