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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Jun 17. 2024

뜀걸음의 추억

언젠가 다시 함께 달릴 수 있을까...


군대는 한자어를 유독 많이 썼다. 

점호(點呼) :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인원이 맞는가를 알아봄.

오침(午寢) : 낮에 자는 잠.

총기수입(銃器手入) : (주로 총기 등을) 새로 깨끗이 닦고 정비하는 것

결식(缺食) : 끼니를 걸음.      



한자를 잘 몰랐기에, 그냥 눈치로 이해했다. 전역하고 한자 공부를 하고 나서야, 그때 썼던 말 뜻을 이해했다. 하지만 아직도 의아한 점이 있다. 군대에서 유독 한 단어만은 억지스럽게 한글을 고집했다. 지금까지 써오던 익숙한 한자어가 있는데도 그랬다. 바로 '뜀걸음'이다.     



’뜀걸음‘은 구보(驅步)를 우리말로 풀어 쓴 단어다.

구보(驅步). 

‘달리어 감. 또는 그런 걸음걸이. 

군인이 아니더라도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다. 적어도 ’점호‘, ’오침, ‘결식’보다는 많은 사람이 알만한 단어다. 그런데 굳이 수많은 한자어를 그대로 남겨둔 채로, 오직 ‘구보’라는 단어만 ‘뜀걸음’으로 바꾸어서 불렀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근데 생각해보니, 군대에 이해가 되는 게 있긴 한가….     



그래.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꾸려는 노력. 환영한다. 나도 그냥 '사고 많은 곳'이라고 쓰면 될 걸, 굳이 '사고다발구간'이라고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 말을 사랑하셨던 '이오덕' 선생님께서는 '한자어'도 '중국 글자말'로 바꿔야 한다고 하셨다. 

'선생님, 그건 좀...'



그래. 굳이 '구보(驅步)'라는 한자어를 쓸 이유는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쓰는 ‘달리기’라는 단어가 있는데, 굳이 ‘뜀걸음’이라는 어색한 표현을 쓸까? 달리기와 걷기를 함께 표현하고 싶어서?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달리다가 걷는 사람들을 ‘낙오자’라고 부르는 집단에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다. 아무튼, 그곳에 있던 2년 안 되는 기간 동안 나는 열심히 ‘뜀걸음’을 했다. 오전에는 연병장 한 바퀴, 오후에는 동네 한 바퀴. 매일 잠시나마 홍천 거리를 뛰던 그 시간은 행복했다.       


   




뜀걸음이 처음부터 좋진 않았다. 군에 입대하고 훈련소에서 했던 첫 체력 측정은 충격적이었다. 짐작은 대충 했다. 입대 전 생활은 엉망이었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고,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생각했다. ‘입대가 하루 더 가까워졌구나….’. 지옥에 조금씩 다가가는 기분이었다. 매일을 살아있는 마지막 날처럼만 살았다. 몸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체력 측정 첫 종목은 1.5km 달리기였다. 연병장 7바퀴 반을 달리면 된다. 평생 달리기를 잘해 본 적은 없다. 그래도 오래달리기는 그나마 괜찮을 줄 알았다. 사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대학교 때 MMA 시합을 준비했다. 매일 숨이 턱 끝까지 차게 운동했다. 운동이 끝나면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타고난 몸치였던 탓에 격투기 실력은 많이 늘지 않았다. 그래도 체력은 많이 좋아졌다. 아. 근데 그게 벌써 몇 년 전인가…. 최근 몇 년간은 달려본 적이 없다. 횡단보도에서 초록 불이 몇 초 남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곤 뛴 적이 없었다. 바로 그날 그 결과가 처참하게 나타났다.   


   

두 바퀴째부터 완전히 지쳤다. 거의 걷는 속도로 달렸다. 수많은 이들이 나를 앞질러 갔다. 나를 두 번이나 지나쳐간 이들도 있었다. 마지막 바퀴를 뛸 때는 이미 달리기를 마친 동기들이 응원해주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3급. 급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느린 속도로 뛰고도 종아리가 너무 아파 걷지도 못했다. 신발을 벗다 쥐가 났다.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눈물이 날 뻔했다. 1.5km가 그땐 왜 그렇게도 길었던지….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받았다. 11사단 공병대대. 그곳에서 매일 저녁 뛰었다. 강제로 뛰었다. 안 그래도 잘 뛰지 못하는데, ‘하나, 둘, 셋, 넷’ 구령도 붙이고, 군가도 부르느라 숨이 더 차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좋았다. 멈추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버텼다. 조금씩 ‘뜀걸음’이 편안해졌다.      



부대에서는 3km 체력 측정을 했다. 훈련소에서 측정했던 거리의 두 배다. 매일같이 열심히 달린 효과는 있었다. 훈련소에서 3급을 받았던 ‘뜀걸음’은 조금씩 급수가 올라갔다. 2급, 1급을 지나 결국 특급까지 갔다. 한 번은 함께 뛴 그룹 내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었다. 달리기로 내가 1등을 하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특급전사가 되려면 3km를 12분 30초에 뛰면 된다. 1km를 4분 10초 안에 들어오면 된다.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게 특급전사 기준을 맞출 수 있다. 그 속도로 5km도 충분히 달릴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3km가 실제 3km에 조금 못 미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특급전사였노라고. 당시 나는 정말 이를 악물고 뛰었다. 지금도 사실 달리면서 그때만큼 힘들었던 적은 많지 않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라는데, 군대만큼은 좀처럼 그렇게 미화되지 않는다. 나에게 젊음을 되돌려준다고 해도, 군대에 다시 가야 한다면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 이대로 살련다. 그래도 그때 함께 군가를 부르며 달렸던 그 순간만큼은 조금 그립다. 매일 매일 함께 뛰며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자고 다짐했던 전우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 다시 함께 달릴 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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