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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Sep 17. 2024

퀀텀 점프

해 뜨기 직전이다!

초등학교 때 책에서 읽은 책 이야기 하나 하겠다. 무슨 책인지, 저자는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흐릿하게 기억이 난다.      

한 거인이 있었다. 거인은 저녁으로 먹을 도넛을 사 왔다. 도넛은 두 종류였다. 큰 도넛과 작은 도넛. 배가 많이 고팠던 거인은 큰 도넛을 먼저 하나 먹는다. 배가 부르지 않자, 큰 도넛을 하나 더 먹는다. 그래도 배가 부르지 않자 또다시 큰 도넛을 하나 먹는다. 그래도 배가 부르지 않자 마지막 남은 큰 도넛을 먹는다. 하지만 여전히 거인의 배는 전혀 부르지 않았다. 여전히 배가 고픈 상태였다. 거인은 어쩔 수 없이 작은 도넛을 하나 먹는다. 마침내 그때 거인은 배가 불렀다. 거인은 크게 후회한다. 

“에잇! 작은 도넛은 하나만 먹어도 배부른데, 괜히 비싼 큰 도넛만 많이 먹었네. 다음부턴 작은 도넛 하나만 사서 먹어야겠다.”     




퀀텀 점프라는 물리학 용어가 있다. 원자 속의 전자는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동할 때 언덕을 오르듯이 매끄럽게 이동하지 않는다. 양자 세계에서 에너지 준위(Energy level)는 불연속적이어서 전자가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할 때는 점프하듯 이동한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괜찮다. 다음 문장만 기억하자. 어떤 일이 연속적으로 조금씩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뛰어오르듯 도약하는 현상을 '퀀텀 점프'라고 부른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개념을 빌려와 기업이 단기간에 혁신을 통해 눈에 띄는 성장을 보여줄 때 '퀀텀 점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퀀텀 점프는 기업뿐만 아니라 모두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삶을 한 단계 성장시키길 원할 것이다. 단기간에 눈에 띄는 성장을 거둘 수 있다면 힘든 일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퀀텀 점프의 함정이 있다. 도약하기 전까지는 변화를 느낄 수 없는 점이다. 몇 번째 먹는 도넛이 배가 부르는 마지막 도넛이 될지 알 수 없다.      



내가 노력한 만큼 바로 결과가 나타난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 않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은 1도에서 99도까지 화학적 변화가 없다. 100도가 되면 끓기 시작해 액체에서 기체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노력한 만큼 꾸준히 성적이 오르면 좋겠지만,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는 과정에서는 점수에 큰 변화가 없다. 그 기간을 버티면 성적은 비약적으로 오른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가 없는 시기를 견디기란 쉽지 않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결과는 더 나빠질 때, 자신에 대한 믿음은 심판대에 오른다.      




달리기도 좀처럼 늘지 않았다. 군 시절, 내가 특급전사가 되는 길을 가로막았던 건 팔굽혀펴기도 윗몸일으키기도 아닌 달리기였다. 팔굽혀펴기 20개도 힘들어하던 나도 매일같이 연습하니 73개를 한 번에 할 수 있었다(지금은 20개도 못하지만). 30개만 해도 배에 쥐가 나던 윗몸일으키기도 꾸준히 연습하니 한 번에 83개를 해냈다(물론 이것도 지금은 반도 못 하지만). 하지만 달리기는 정말 해도 해도 늘지 않았다. 게다가 군시절 억지로 한 운동 중에 달리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었다. 가장 열심히 하고 꾸준히 하는 운동에서 성과가 나지 않으니 억울했다. 여유 있게 3km를 12분 30초 안에 달려오는 선임과 동기들을 보며 생각했다. 

‘달리기는 타고나는 거구나. 나는 이미 글렀어.’

그래도 매일 저녁 부대 밖으로 달리기를 할 때 낙오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자 몇 달에 한 번씩 급수는 조금씩 올라갔다. 3급에서 2급으로, 2급에서 1급으로, 마침내 1급에서 특급으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동기들보단 훨씬 오래 걸렸지만, 결국엔 같은 특급전사가 되었다.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10km를 50분 안에 뛰는 분들이 정말 부러웠다. 10km를 50분 이내에 뛰려면 1km당 5분 페이스로 달려야 한다. 이는 나에게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처음 나간 10km 마라톤에선 이를 아쉽게 실패했다. 하지만 꾸준하게 달리다 보니 두 번째 마라톤에서는 50분 이내로 뛸 수 있게 되었고, 10km 기록은 47분, 43분, 42분까지 쭉쭉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정체가 찾아왔다. 열심히 달려도 기록이 오히려 나빠지고 있다. 하지만 이젠 믿는다. 달리기를 그만두지만 않으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지금은 더 큰 도약을 위해 잠시 무릎을 굽히는 중일 뿐이라고.      




아무리 힘든 일도 바로 성과가 나면 견딜 만하다.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이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는데, 오히려 성적이 떨어졌을 때. 더 열심히 달렸는데, 기록이 향상되지 않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좌절한다. 우리가 한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끓는 물이 그렇듯, 전자가 그렇듯, 거인의 배고픔이 그렇듯. 그 순간만 버티면 엄청난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스스로를 믿었으면 좋겠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막연하고 지루한 순간을 견디면 좋겠다. 해 뜨기 직전 하늘이 가장 어둡다고 한다. 어둡고 막막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쳐보자.      


‘해 뜨기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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