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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Sep 28. 2024

오버페이스는 오바이트를 부른다

우웩..

올해 겨울엔 속도 욕심을 버렸다. 천천히 달리며 달리는 거리를 늘려나갔다. 1km를 6분이나 6분 30초 페이스 정도로 달렸다. 2024년 2월 17일. 동계 국제마라톤 대회를 나갔다. 2024년 첫 10km 마라톤이었다. 겨우내 천천히만 달리다 보니 빠르게 뛰는 법을 잊어버렸다. 내가 지금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올해 첫 대회라서 좋은 기록을 내고 싶었다. 출발과 동시에 냅다 달렸다. 1km를 통과했을 때, 스마트 워치에서 현재 페이스를 알려주었다. 

‘1km를 달리셨습니다. 현재 페이스는 4분 10초입니다.’

평소 내 속도보다 너무 빨랐다.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쓸데없는 망상에 빠졌다. 

‘어쩌면 나 조금 빠를지도?’     



역시나 아니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 속도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1km가 지나자마자 속도는 떨어졌다. 숨은 점점 가빠왔다. 속도를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가 없었다. 5km 반환점이 보였을 때 좌절감이 몰려왔다. 

‘아직도 절반밖에 안 왔다니….’ 

반환점을 돌고 나서는 몸이 완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나를 추월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나를 추월한 한 분을 목표로 삼고, 무작정 따라갔다. 검정 티를 입은 러너 분의 등만 보며 달렸다. 여기서 밀리면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목에서 피 맛이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침을 먹지도 않았는데, 음식물이 위에서 꿈틀거렸다. 방심하면 토가 나올 것 같아 온 정신을 호흡에 집중했다. 10km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저 멀리 도착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손에 닿을 듯한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겨우 도착하고 바로 주저앉았다. 메달 받는 곳까지 갈 힘도 없었다. 달리기를 멈추었지만, 호흡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우웩’하는 헛구역질이 나왔다. 옆에 계신 아저씨께서 괜찮냐고 물어봐주셨다. ‘괜찮습니다.’ 대답하는 중 호흡이 꼬여 또다시 헛구역질이 나왔다. 민망함을 내팽개치고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심호흡하며 시계를 보았다. 43분 49초. 다행히 기록이라도 좋았다. 내가 45분 이내로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고통스러운 만큼 빨라지는구나.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딱 한 달 뒤,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2024년 동아 마라톤 10km 대회를 나갔다. 동아 마라톤은 나에게 의미 있는 대회였다. 1년 전 동아 마라톤이 내 인생 첫 10km 마라톤이었다. 그땐 한 시간 안에 들어오는 게 목표였는데, 돌이켜보니 1년 동안 많이 발전했다. 그날은 기록 욕심은 나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달리고 나서, 풀코스를 나가시는 송도러닝크루 분들을 응원하는 게 목적이었다. 지금까지 달리면서 내가 받은 수많은 환대를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러 가는 날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출발선에 섰다. 편안한 속도로 출발을 했다. 달리면서 몸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컨디션 좀 괜찮은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빨리 뛰어볼까?”

“좋아. 대신 너무 빨리 가지는 마.”

아주 조금씩 속도를 올려 나갔다. 이상하게 힘들지 않았다. 다시 몸에 말을 걸었다. 

“오늘 이상한데? 왜 안 힘들지?”

“그러게. 좀 더 달려봐도 괜찮을 것 같아.”

시계를 보니 한 달 전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런데 몸은 훨씬 편안했다. 8km 지점에서 송도러닝크루의 응원을 받았다. 그 에너지를 받아 마지막 2km를 내달렸다. 10km가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빨리 끝나 아쉬웠다. 기록을 확인했다. 딱 42분이었다. 또다시 내 최고 기록을 세웠다.      



한 달 전 동계 국제마라톤에선 10km가 너무 고통스럽고 길었다. 동아 마라톤에선 즐겁고 오히려 아쉬울 정도로 짧게 느껴졌다. 하지만 속도는 동아 마라톤에서 더 빨랐다. 차이가 무엇일까? 바로 오버페이스였다. 오버 페이스는 욕심에서 나온다. 내가 가진 그릇의 크기보다 더 많은 것을 담으려는 욕심. 내가 투입한 노력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고 싶은 욕심.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하고 싶은 욕심. 욕심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특히 달리기는 이 욕심을 처절하게 응징한다.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하면 중반부터 달리기는 급격히 힘들어진다. 속된 말로 ‘한 방에 훅 간다.’.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심장은 요동친다. 속도는 급격하게 느려진다. 한 번 느려진 속도는 회복할 수 없다. 평소엔 가볍게 달리던 거리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로 완주를 하기도 하고, 레이스를 중간에 포기하는 러너도 있다. 결승점을 통과하고 나서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숨이 찬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라톤 페이스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이븐 페이스’. 처음보다 조금씩 속도를 올려 나가는 ‘네거티브 페이스’. 처음보다 조금씩 속도가 줄어드는 ‘포지티브 페이스’. 최악은 ‘포지티브 페이스’이다. 처음에 넘쳐나는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냅다 달린다면, 중반부터 레이스는 지옥이 된다. 결국 일그러진 표정으로 결승점에 도착하게 된다. 이상적인 달리기 페이스는 ‘이븐 페이스’와 ‘포지티브 페이스’이다. 이를 위해선 내 페이스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내가 견딜 수 있는 속도를 찾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게 달려야 한다. 혹여나 마지막에도 힘이 남는다면 그땐 좀 더 빠르게 달려도 좋다.      



마라톤에서 사람들은 같은 결승점을 향해 달린다. 하지만 목표는 서로 다르다. 누군가는 1등을 목표로 달리고, 누군가는 과거의 나를 이기기 위해 달린다. 누군가는 완주를 목표로 달리고, 누군가는 함께 달리는 이의 완주를 돕기 위해 달린다. 저마다 자신만의 목표를 위해 달리지만, 공통의 목표가 하나 있다. 행복하게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내 목표를 잊고, 남들을 쫓아가게 되면 그날 달리기를 망치게 된다. 찡그린 얼굴로 결승점을 통과하게 된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걸 두려워 말고 견뎌야 한다. 그래야 웃으며 결승점을 통과할 수 있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 속도를 찾아야 한다. 편한 호흡으로 가야 한다. 초반 레이스에서 조급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마지막 순간이다. 결승점을 통과하는 그 순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혼자만 교원 임용 시험에서 떨어졌던 동기 형은 1년 뒤, 다시 한번 시험을 쳐 교사가 되었다. 교직이 맞지 않아 떠난 동기 한 명은 1년 동안 수능을 준비해 약대에 들어갔다. 박사의 꿈을 가지고 대학원에 다니는 친구도 있고, 대기업을 다니다 관두고 목수가 된 형도 있다. 마라톤처럼 삶도 저마다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중요한 건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이다. 긴 인생의 초반을 얼마나 빠르게 달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지막 결승점에서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남들의 페이스를 따라가다가는 마라톤도 인생도 망친다. 남들의 속도가 아닌 내 속도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도로 끝까지 달려 나가면 된다. 그뿐이다.     



나처럼 오버페이스로 달리다가 오바이트가 나오는 경험을 하지 않길. 

부디 인생이란 마라톤은 모두가 웃으며 결승선을 통과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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