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생으로 남지 않겠다는 첫 선택
“지금 학생이신 거예요?”
앳된 나를 보고 묻는 첫 질문은 이렇다. 이에 대답하기 어려워한 지가 어느덧 4년째가 다 되어갈 참이다.
“그건 아니고 일해요.”
“아, 바로 취업하신 거예요?”
“아뇨. 아르바이트해요.”
그들의 표정은 알 수 없이 짧게 경직된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얼굴들. 이 질문 뒤에 이어지는 꼬리 질문은 호기심과 존중 사이를 널뛰기하며 나를 곤란하게 하기도, 안심케 하기도 한다. 나는 대한민국에 사는 23살 청년이다. 대학교를 진학하지 않은, 그렇다고 직장인도 아닌 청년.
이곳에서 그 무엇도 소속되지 않은 20대 초반으로 살아가기란 어려운 법이다. 한번은 친한 친구가 그런 얘길 했다. 나는 내 친구 중에 가장 어떻게 살고 있을지 예상이 안 가는 친구 두 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너라고. 나를 욕하는 건 아녔다. 친구는 그만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단 긍정을 하고 싶었던 참인데, 그것이 첨예한 지적으로 들렸다. 나는 무얼 하고자 하는지 정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던 탓이다. 디자인도 하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노래도 하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영상도 찍고 싶었던 그런 욕심쟁이. 그런 내가 대학을 바로 안 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등학교는 인문계 이과를 나왔다. 이렇게 말하면 수재라는 듯이 놀라지만,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먼저 손사래를 친다. 그야 공부를 안 했으니까. 했는데 안 했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걸 놔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 코로나19로 온라인 클래스를 듣는 때에 나는 답지를 베껴 올리느라 온 시간을 쏟았다. 꼴에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는 꼬박해야 하는 게 응당 맞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 덕에 수학 선생님들은 지필평가로 두 자릿수를 겨우 맴도는 내 성적을 보고서 왜 이러냐고 여쭤보실 정도였다. 그에 더불어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아예 모든 걸 안 해가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보이는 수행평가라면 죽기 살기로 했던 나는 수행평가조차 해가지 않는 불량 학생으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인성이 나쁜 학생도 아니었다. 그저 학업에 불성실한 학생이었을 뿐이다.
왜 그랬냐 묻는다면 단언할 수 있다. 진정 내가 원한 길이 아니었다. 나는 그 시절, 의공학과를 지망한다고 했다. 아빠는 문과라면 돈 벌기 힘들고, IT 개발자가 뜨는 이 시기에서 공학으로 가길 희망하셨기 때문이다. 개중에서 빅데이터학과를 추천하셨다. 하지만 영 빅데이터학과는 동기부여가 되질 않았다. 나는 학과만이라도 내가 가슴 뛰는 걸로 택하고 싶었다. 때마침 학교에 생체 공학부 대학생 멘토가 오셔서 학과 설명을 해주셨다. 그때 처음으로 삶을 새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의공학의 특성에 감동했다. 우리 외삼촌께서 파킨슨병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근육이 점점 굳어가는 파킨슨병 말기에 도달한 삼촌은 혀까지 굳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상에 누워 뭐라 말씀하셨는데, 그때 그 병상을 뺑 둘러싼 가족 모두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었다. 얼마 안 돼 외삼촌은 작고하셨다.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초등학생의 나는 이후 뉴스에서 눈동자 깜빡임만으로 파킨슨병 환우와의 소통을 돕는 자판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만약 의공학자가 되면 내 외삼촌과 같은 환우들의 뇌와 연관해 신경계 교류를 통한 의료기기 개발이 뒤따른다면 완전한 소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달뜸에 나는 의공학과 지망생이 됐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컴퓨터라면 좀 잘 다룬다고 생각했던 나는 코딩 동아리에 들어가서 이미 웹 및 앱 개발하는 학생들을 마주한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미진한 수•과학 성적에 발목 잡히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왜 이과로 진학했냐고? 부모님의 동의 없이는 계열을 함부로 결정해 제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설득해 문과로 진학할 자신도 없었다. 그야 문과로 간다면 더 치열하게 등수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돈을 벌고 싶었다. 어른인 아빠의 선택이 내 선택보다 훨씬 현명할 거라 무책임하게 믿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에도 없고, 자신감을 가질 근거조차 없는 꿈을 꾸며 매일의 좌절을 얻게 됐다. 고등학교 시기부터 아예 모든 걸 포기 했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없구나. 나는 안 될 사람이구나. 나는 ‘정시 파이터’라며 포기 대신 전략을 택한 사람인 척했다.
“대학교는 어디 지원할 거니?”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약간의 침묵 뒤로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게 교무실을 나왔다. 내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입시 상담의 결말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아무 곳도 지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졸업하고서 당연히 다시 이공계로 재수할 거라 예상하셨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인서울 공학계열을 독학 재수해서 갈 수 있을까. 전혀 아니었다. 현실을 깨우칠 차례였다. 나는 갭이어라는 명목하에 1년 동안의 진로 탐색을 선언했다. 부모님은 일단 알겠다고 하셨다. 간간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돈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차가운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됐다. 휴게시간만 되면 어른들께서는 꼭 나를 수식하는 소속을 물어보셨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도 크게 없었다. 이를테면 어느 대학교의 어느 과를 가고 싶다는 말이라든지, 어느 계열의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든지. 차라리 N수생, 취준생의 수식어가 부러울 정도였으니까. 나는 1년 동안 내가 뭘 하고자 하는지 탐색하는 시간을 갖는다며 장황히 설명해야만 했다. 거짓말은커녕 융통성도 없던지라 대강 학생이라며 웃어넘길 수 없는 스무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