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마디
다음 날, 일찍 도착한 교실.
지난 소개팅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AA카페에 들어섰을 때, 은은한 커피향과 함께 달큰한 냄새가 났다.
이건 분명 비엔나 커피 향이다.
자리에 앉아 커피향을 음미했다.
마음을 다잡고, 연습한 문장들을 냅킨에 적어보았다.
조용히 읽어보는데, 누군가 출입문을 열었다.
그녀다.
지금 나의 온 신경은 무릎에 집중되어 있다.
테이블이 좁아 건너편의 그녀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
“편하게 앉으세요.”
그녀의 말에 물 컵을 엎지른 나.
뒷정리를 위해 냅킨을 다 써야 했다.
시작부터 꼴이 말이 아니다.
나는 마시는 법도 잘 모르는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비엔나 커피를 마시는 그녀가 물었다.
“소개팅 많이 해봤어요?”
“네?”
‘사실대로 처음이라 할까?
많이 해봤다고 할까?’
“뭐 그냥 그래요.”
입이 허락도 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웃어주었지만,
나는 찻잔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많은 것을 물었다.
나는 단답형으로 답했다.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고개를 까닥이며,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 이 노래 나도 알아요. 중경삼림 맞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질문이다.
그녀의 마지막 뒷모습이 생각나니, 속이 답답하다.
머리를 긁적이는 내게 짝꿍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야. 인상펴. 뭔 일 있어?”
“아침부터 니 얼굴 보면 기분 좋겠냐?”
웃으며 장난을 걸었다.
“디질래? 거울 갖다줄까?”
“키키키”
웃고 있던 짝꿍이 턱으로 앞을 가리킨다.
귀를 쫑긋 세우는 제스처도 함께.
앞자리에는 어제의 삼총사들이 모여있다.
대화를 엿듣고 있지만, 관심은 없다.
때마침 울리는 수업종.
‘이자식들… 그래서 성공한거야 뭐야?’
관심은 없지만, 결과는 궁금하다.
3교시 쉬는 시간, 우리들만 점심시간이다.
못생긴 포르토스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 어제 만난 여자친구.”
뭉툭한 그 녀석의 손가락 사이 여학생의 증명사진.
‘겨우 한 번 만난 주제에 여자친구?’
눅눅한 맛살 튀김을 집어 씹었다.
“예쁘네.”
곁눈질로 사진을 훑어보았다.
정말 예뻤다.
세상엔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보라머리 친구와 다른 친구들은
작은 소리로 환호성을 지른다.
물 한 잔을 벌컥 들이켜니 트림이 올라온다.
“우욱.”
급하게 밥을 먹어서일까?
속이 더부룩하다.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축구 소리.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소개팅녀가 더 예쁘긴 해.’
소개팅녀의 얼굴이 떠오르니 속이 더 불편하다.
그러다 어느새 잠이 들었나…
이국적인 분수대 앞.
나는 소피 마르소의 손을 잡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야 수업 시작할 시간~”
짝꿍이 흔들어 깨웠다.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는데,
땀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가 흥건하다.
소매로 닦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내게,
짝꿍은 물과 함께 정체 모를 알약 하나를 건넸다.
“너 체했지? 땀 장난 아니야 너.
일단 이거라도 먹어봐. 소화제임.”
“오 땡큐.”
책상 정리를 하는 중, 짝꿍의 연습장이 눈에 들어온다.
연습장이라기엔 무언가 분위기가 다른데?
어? 저거 뭐야?
저거 하트잖아?
“그거 뭐냐?”
“아무것도 아니야. 몰라도 돼.”
황급히 연습장을 닫으니 더더욱 수상하다.
“아 뭔데? 하트 뭐야? 연애편지냐?
니 손으로 보여줄래, 뺏길래?”
“진짜 비밀이야. 알겠지?”
주위를 의식하며 조심히 건네 받은 연습장.
짝꿍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읽지는 말고 보기만 해.”
“키키. 알써.”
짝꿍의 비밀은 교환일기였다.
그것도 학원에서 만난 여학생과의!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왔다.
짝꿍은 교환일기를 열심히 적고 있다.
“재밌냐?”
교환일기라, 손발이 오그라드는 단어다.
“재미? 노노. 설레는 맛이지.
연애초보님은 모르시죠잉~”
“디질래?”
주먹을 들어 보이자,
짝꿍은 농담이라며 손사레를 쳤다.
그 여학생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과정.
교환일기의 시작과 현재 상황까지를 설명해주는 짝꿍.
반짝 반짝 빛나는 눈을 보아하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일기잖아? 근데 그걸 주고 받는다고?”
“그치. 처음에는 일기처럼 썼는데, 그러다보면 나중엔 편지처럼 되더라고.”
“연애편지?”
“연애는 무슨.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근데 왜 하는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여기다 적으면 되니까 완전 편해.
너도 해보면 알걸? 아… 너는 솔로지 참…”
“너 진짜 디질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업종이 쳤다.
소화제 덕분인가.
트림을 하고 나니 속이 조금 가벼워졌다.
다만, 생물 선생님에게 한 소리 듣긴 했지만.
수업에 집중하는 척 펜을 들었다.
AA카페에서 물에 젖어버렸던 말을 연습장에 적어본다.
소피 마르소를 만나면 해주고 싶었던 말들도 적어본다.
막힘이 없다.
다음 수업 시간에도 연습장을 꺼냈다.
이번엔 조금 다른 어조로 써봤다.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꽉 찬 연습장.
꽤 그럴싸해 보이지만,
딱히 써먹을 곳이 없다.
펜을 잘근잘근 씹으며 연습장을 덮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그 문구.
“남자친구 구해요.”
떨리는 발을 멈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