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하는 인간

4-2. 정보보다 높은 사유(3)

by 더블윤

여전히 정보는 우리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은 채, 그저 우리의 뇌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그 스쳐가는 정보들 중 일부를 붙잡아 생각으로 머무르게 하고, 때로는 그로 인해 고뇌라는 내면의 고통에 초대받는다.
그러나 그 머묾과 고통 안에는 언제나 성찰과 변화의 가능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성찰을 위해 반드시 지금 흘러가는 정보들을 활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뇌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데이터와 감각, 기억과 인상을 내면화하여 간직해 왔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정보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와 같다면, 우리의 내면은 그 비를 담아두는 깊은 저수지와도 같다.
그렇다면 변화는 ‘지금의 정보’를 붙잡는 데서가 아니라, 이미 나에게 저장된 그 저수지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저수지로 천천히, 조용히 걸어 들어가는 행위, 바로 그것이 '사색(思索)'이다.




사색은 사물이나 사건의 ‘맥락’이나 ‘배경지식’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는 태도이다.

예컨대 사색의 시작은,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나는 여기에 있다.” 같은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정보는 ‘밖’에서 오지만, 사색은 ‘안’에서 일어난다.


정보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 것인가”를 말해주지만, 사색은 “내가 아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묻는다.
인간의 뇌에는 거의 모든 정보가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저장되어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떠올릴 때, 그 기억의 대부분은 어떤 인물, 어떤 사물, 어떤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 모든 기억은 결국 어떤 ‘존재’와의 관계로 귀결된다.


사색의 시작은 이 저장된 존재를 불러오는 데서 출발한다.
마치 내면의 어딘가에 보관된 ‘존재의 문서’를 다시 열고, 그것을 퇴고하고 수정하며, 의미를 새롭게 덧붙이는 작업과도 같다. 이때 한 장이던 문서는 어느새 200장이 넘는 장편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어떤 존재를 깊이 생각한다는 점에서, 사색의 행위는 철학의 형이상학과도 긴밀하게 얽혀 있다.
어쩌면 형이상학은 사색으로 빚어낸 사유로 만든 학문일지도 모른다.




형이상학(Metaphysics)은 사색의 지평을 요구한다. 형이상학은 말 그대로 사물의 본질, 존재의 이유, 세계의 근원 등, ‘물리적인 것 너머’를 묻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존재는 감각이나 논리, 정보나 데이터로는 접근할 수 없고, 오직 깊은 사색을 통해서만 길어낼 수 있는 차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왜 존재하는가?”
“시간은 흐르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의식은 어디서 오는가?”
이런 질문들은 외부의 데이터나 정보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오직 내면에 저장되어 있는 '나', '시간', '의식'에 대한 존재를 불러와 깊은 사색을 시작해야만 나올 수 있는 물음이다.
사색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정보 뒤에 있는 의미와 원인을 묻기 시작한다.
다른 예를 든다면,
‘사람이 죽었다’는 건 정보지만,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사색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물음은 곧 형이상학적 사유로 이어진다.


“형이상학은 존재를 존재로서 묻는 물음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형이상학은 사색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며, 형이상학은 단순히 고차원의 지식이 아니라, 존재와 마주하기 위한 사색의 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현대 철학에서 형이상학이 사라지는 이유를 인간이 더 이상 사색하지 않기 때문이라 비판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불렀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는 “여기 있는 존재”라는 뜻이지만, 철학적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유일한 존재”, 즉 자기 존재에 대해 자각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가 주장한 '현존재'는 '세계 속의 존재'였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세계 속에 던져져 있고, 거기서 이해하고, 사용하고, 돌보고, 관계를 맺으며,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구성하는 존재로 보았다. 즉, 인간은 절대 정보처럼 추상적인 개체가 아니라, 시간, 장소, 관계 속에 살아 있는 ‘상황적 존재’이다.
다시 말해, 현존재는 단순히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사유적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사유 또는 생각의 핵심에는 '사색'이 있었다.
그는 인간의 사고 종류를 두 가지로 구분했는데, 바로 계산하는 사고와 사색하는 사고였다.
계산하는 사고란 정보를 분석하고 효율을 따지며 도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현대 문명이 지배된 방식이기도 하다.

반면 사색하는 사고란 존재 그 자체를 응시하고, 목적 없이도 머물 수 있는 깊이 있는 사유를 말한다.


“우리는 생각(사유)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 하이데거


하이데거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사유란 사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대부분 계산적인 방식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사색이 아닌 계산적 사고에 지배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 바라본 것이다.


그가 사색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오직 사색으로 만이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자연을 경청하고, 기술과 소외에 저항하는 인간 본래의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 즉 죽음이라는 필연을 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진짜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현대 기술문명이 이러한 인간의 본래 모습과 존재의 은폐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기술은 세상을 ‘자원’으로만 보게 만들고, 인간을 ‘조작 가능하고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그래서 그는 기술 중심 문명에 저항하며, “시와 예술, 사색”을 통해 인간의 본래 모습을 되찾고, 존재와 다시 연결되어야만 한다고 역설해 온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사색하고 사유하며 그를 통해 '현존재'라는 인간의 본모습으로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랬던 인물이었다.
형이상학은 존재를 묻는 질문이고, 사색은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정신의 자세다.

우리가 다시 깊이 생각하기 시작할 때,
철학은 다시 우리 삶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사색은 존재가 존재를 묻는 행위이다.
그리고 사색은 사유라는 인간의 본모습을 위한 성찰이었다.

우리, 즉 인간이란 존재는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도 인간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밤, 별을 올려다보며 이름조차 모를 저 너머를 상상했고, 불을 지펴놓고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삶과 죽음을 떠올렸다.

인간은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 사고하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 그리고 ‘살아 있음’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해 사유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정보가 제공해 주는 사실이나 데이터 이상의 것이었다.

정보는 대상을 분해하지만, 사색은 그 너머의 전체를 느끼고자 한다.
우리는 앞서 생각하는 인간, 고뇌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와 배움은 그 생각과 고뇌를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은 판단보다 먼저 멈추어 보는 일이자, 정보보다 천천히 바라보는 일이며, 고뇌보다 더 깊이 가라앉는 일이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거대한 전복과 전환이 이루어지는 고요한 운동이다.


생각을 생각하고,
느낌을 바라보고,
고통을 관찰하는 것.


사색이란,
자신과 세계를 응시하는 일이며,
그 시선 끝에 도달하는 어떤 투명한 진실과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도 있는 조용한 혁명이 된다.

'의미'와 '진실'에 대한 감각은 사색 속에서 길러진다. 지식은 쌓이고 잊히지만, 사색은 존재의 진실을 마주하며, 결국 존재로서 존재를 바꾼다.
존재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빠름을 이야기하는 계산적인 세상에서,
존재를 들여다보는 가장 느린 길을 걷는다.
어쩌면 사색이란,
정보의 시대에 맞서는 가장 고요한 저항이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반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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