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시대보다 앞선 배움(1)
배움이란, 변화를 위한 행위이며, 모든 생명체가 지닌 본능이자 생존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의 완성을 향해 존재를 ‘짓는’ 모든 것이었다.
그 안에는 지식과 정보가 있고, 예술과 아름다움이 담겨 있으며, 사유와 성찰이 깊이 스며 있다.
배움의 인도자는 단연 교육이다.
교육은 배움을 이끌고, 관리하며, 마침내 열매 맺게 하는 힘이다.
되돌아보는 것은 진보의 전주곡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성찰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의 배움에 대하여, 그리고 그 배움을 인도하는 교육에 대하여.
질문이 이어진다.
우리의 배움은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 배움은 제대로 인도되고 있는가.
과연, 우리의 교육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일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육은 문명과 사회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교육의 모습은 오늘날의 문명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공동체는 개인으로 이루어진다.
잊지 말자. 개인이 곧 공동체이며, ‘나’라는 존재가 이 사회를 만들었고, ‘우리’가 지금의 문명을 만든 것이다.
이제, 다소 따가운 바늘로 지금의 문명, 곧 당신 자신의 내면을 찔러보려 한다.
당신이 바라는 인간의 삶은 이렇다.
정서와 감정보다는 실리가 우선이고,
기술만이 삶을 풍요롭게 하기를 바라며,
숫자와 등급표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길 원한다.
공존보다 경쟁을,
상생보다 탈락을 선택한다.
인생의 목적은 ‘삶’이 아니라, 취업, 즉 ‘노동’에 담겨있다.
이것이 문명이 교육을 통해 바란 인간의 모습이며,
사회가, 우리가, 당신이, 그리고 내가 함께 그려낸 인간의 형상이다.
아름다운가?
만족스러운가?
우리의 교육은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에드가 포르가 외쳤던 '존재를 배우는 배움'과 존 가드너가 말한 '자기 갱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약용의 '인간이란 본래 선한 존재이며, 배움이란 마음을 닦는 일'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교육이 인간의 마음을 닦아 내고 있는가?
그들이 배움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이 오늘날 이루어진 것이 맞는 것일까?
아쉽게도 오늘날의 교육은, 인간을 배움이라는 존재의 건축으로 온전히 인도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배움의 목적과 가치를 잊은 채 평가를 위한 교육만이 반복되고 있다.
학생은 시험지를 통해 판단되고, 학교는 성적을 기준으로 서열화되며, 교사는 성취도에 따라 평가받는다. 우리는 어떻게 이 지점에 도달한 것일까?
이러한 교육의 변질은 단순히 교육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과 사회가 교육에 부여한 역할에서 비롯된 구조적 결과다.
20세기말부터 전 세계는 '책무성(accountability)'이라는 이름 아래 결과 중심의 교육 개혁을 추진해 왔다. 문명과 사회는 교육을 향해 “성과를 증명하라”, “성과는 숫자로 말하라.”라고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가장 쉽고 값싸고 명확한 지표가 바로 ‘시험 점수’였다. 시험이 교육의 중심이 된 것은, 효율성과 관리의 논리가 배움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화와 기술 경쟁은 인재를 국가 경쟁력의 자원으로 만들었다. 국제 시험인 PISA, TIMSS의 국가별 순위는 교육 정책을 좌우했고, 점수는 곧 경제력이라는 단순한 공식이 당연시되었다. 실제로 많은 국가는 PISA 점수가 하락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과정과 수업 방식을 통째로 개편했다.
그 결과, 교육은 더 이상 '인간을 키우는 장'이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을 도구를 훈련시키는 곳'이 되어버렸다.
대학 입시는 이 흐름을 가장 강하게 반영한다. 상위권 대학과 기업은 여전히 시험 점수 중심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학생과 학부모는 이를 위해 사교육에 의존한다. ‘입시’는 유아기부터 시작되며, 교육은 입시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그 본질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시험 점수는 인간의 가능성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는가?
순위와 등급은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을 얼마나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점수를 위한 배움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 배움은 진정 우리를 변화로 인도하고 있는가?
오늘날의 교육은 평가의, 평가에 의한, 평가를 위한 배움으로 치우쳐 있다. 그러나 평가와 성적의 본질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그리고 교육학자였던 존 듀이(John Dewey)는 그의 저서 『Experience and Education(경험과 교육)』에서, ‘평가’란 경험이 이후 학습과 연결되는 정도(지속성)를 따져보는 질적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쉽게 말해, 평가란 학습자의 배움의 수준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점검해 보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평가와 배움을 분리하지 않았으며, 평가를 배움의 연속적 과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가가 배움의 과정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평가가 지닌 본질에 담겨 있다.
평가란, 어떤 대상이나 활동의 가치, 수준, 효과성 등을 판단하거나 등급을 매기는 행위이다. 교육학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학습자 또는 교육 과정의 목표 달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평가란 ‘얼마나 잘 배웠는가’를 알기 위한 수단이자, 그에 따라 교육을 개선하거나 지원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평가의 본질은 ‘되돌아봄’이며, 피드백이고, 곧 성찰이다.
평가 없는 배움은 안전성 검토 없이 건축물을 쌓는 일과도 같다.
존재라는 건축물이 얼마나 단단하고 견고하게 쌓여왔는지 확인하는 단계 없이, 계속해서 위로만 쌓아 올린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쌓아온 배움의 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가는 그 붕괴를 예방하는 장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적표란 결국 존재라는 건축물에 대한 ‘안전성 검토 결과’를 받는 행위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확인하고 돌아보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약한 부분은 보강한다. 그리고 비로소, 온전한 존재의 건축을 이루어 나간다.
다시 말해, 평가와 성적이라는 배움의 반성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배움의 존재’로 나아간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바, 배움이란 존재를 짓는 일이며, 변화와 갱신의 시작점이다. 배움의 정도를 평가하고 성적을 기록하는 이유는, 존재의 규정이 아닌 배움의 성찰이 되어야만 한다. 진정한 인재는 성적으로 규정된 존재가 아닌, 배움을 통해 변화의 힘을 내재시킨 존재이며, 자신뿐 아니라 이 땅의 공동체와 문명을 갱신시킬 동력을 가진 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육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방향은 평가와 성적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다.
평가는 경쟁을 위한 도구도, 순위를 매기기 위한 숫자도 아니다.
학습자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지 성찰하게 하며, 배움의 과정을 지지하고 완성해 주는 나침반이어야 한다.
그것이 곧 배움의 본질을 되찾는 길이며, 교육이 다시 인간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경쟁은 자기 가치를 외부의 평가에 의존하게 만든다.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해낸 업적으로 규정되고, 더 나아가 ‘좋은 사람’인지 여부는 당신이 ‘이겨낸 사람’의 수에 비례한다.”
- 알피 콘(Alfie Kohn), 《경쟁을 넘어서》
교육은 스스로 자문하며, 이제 배움의 목적과 의의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공교육의 목표는 양육인가, 성과인가?
존재의 갱신과 변화를 위해 정말로 등급이 필요할까? 순위가 필요할까?
대학이 왜 순위가 매겨져야 하는가? 학생은 왜 선발되어야만 하는가?
상대평가 대신 “확실히 안다 / 더 알아야 한다”로 구분하는 절대평가는 불가능한 일인가?
평가와 성적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가치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원하는 인재는 결코 숫자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성과를 중시하는 기업이 사람을 점수로 평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 배움만큼은 그 어떤 숫자로도 인간의 가치를 단정 짓거나 배움의 길을 단절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배우고 싶고,
앞으로도 배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