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시대보다 앞선 배움(3)
서윤은 희미하게 밝아지는 빛을 느끼며 눈을 뜬다.
그것은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아니라, 방 안의 생체리듬 조율 조명이 천천히 밝아지며 서윤의 몸과 마음을 깨우는 방식이다. 이 빛은 그날의 기분과 수면 깊이를 읽고 조율되어, 자연의 햇살보다 더 자연스럽게 아침을 만든다.
“좋은 아침이야, 서윤.”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공지능 도우미 ‘소피’가 인사한다. 하지만 소피는 단순한 AI 비서가 아니다. 그건 서윤의 삶 전체를 함께 배우고 기록하며, 성장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존재다.
침대에서 일어난 서윤은 가장 먼저 ‘마음의 온도’를 측정하는 공간으로 향한다. 하루의 배움은 지식 이전에 감정과 의식의 상태를 살피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새로운 교육과정의 방침 때문이다.
그녀는 어제 남긴 사유 일기에서, 소피가 정리한 감정의 결과와 생각의 흐름을 차분히 들여다본다. 그것에 기반해 오늘의 수업 추천이 화면에 나타난다.
① 수업명: 「기후변화를 이겨낸 인류의 역사」
장소: 기억의 숲 3관
준비물: 지식 모듈, 칼 세이건 모델 (AI 단말기 전용)
참고서적: 《과학으로 본 공존의 운명》 외 2권
② 수업명: 「윤리가 완성한 물리학」
장소: 희망의 강 2관
준비물: 지식 모듈, 소크라테스 모델(AI 단말기 전용)
참고서적: 《전쟁을 이긴 철학》 외 1권
서윤은 청강이 가능한 여러 추천 수업을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수업장소에 눈이 머물렀다.
“기억의 숲이네. 여기 되게 좋았었어.”
“응 맞아, 서윤. 지구 생태와 문명의 흐름을 함께 배울 수 있는 장소야. 여러 홀로그램 교육자료와 함께 복원에 성공한 여러 동식물의 생태도 함께 관찰할 수 있지. 수업 내용도 17세기 후반 인류의 오류를 복기하며, 회복적 정의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매력적인 강의가 준비되어 있대."
소피의 목소리는 늘 조용하지만 서윤의 마음에는 작은 설렘이 흐른다.
이 시대의 학교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공간이 배움의 장이 되는 곳이다. 인간은 이 공간들 속에서 존재를 스스로 구성해 나가며, 지식을 외우기보다 깨닫고 연결하고 변형하는 능력을 훈련받는다.
다채로운 수업은 고르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지만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한다는 사실과, 하루하루 존재의 변화를 이끌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점은 동일하다.
서윤은 학습복을 입는다. 옷의 패턴은 그날 배우게 될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오늘은 초록과 흙빛이 섞인 그러데이션이다. 그녀는 이 색이 좋다. 생명과 순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방 대신 작은 기기 하나를 손에 쥔다.
그건 기록장치이자 질문 생성기, 그리고 기억을 구조화하는 ‘지식 모듈’이다. 그것을 통해 서윤은 세상과 연결되며, 자신만의 배움의 우주를 하나씩 확장해 나간다.
그녀는 수업에 나가기 전 자신의 AI단말기를 조작하여 '칼 세이건 모델'을 다운로드한다. 다운로드가 완료된 단말기에서 유쾌한 듯하면서도 중후하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서윤. 오늘은 과학수업인가 보구나!"
"안녕하세요 세이건아저씨! 음... 비슷하긴 한데 조금 다를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기대돼요!"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바람은 부드럽게 불어오고, 하늘은 열려 있다.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가능성들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 서윤은 단단히 서 있다.
오늘도 또 하나의 사유가 세상을 새롭게, 자신을 더욱 깊게 만들어줄 것이다.
기억의 숲 3관에 도착하자,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공기엔 흙냄새와 풀향기, 그리고 먼 옛날 인류가 잃어버렸던 자연의 숨결이 섞여 있었다.
이곳은 실내 공간임에도 ‘숲’이라 불린다. 복원된 식생 시스템과 홀로그램 아카이브가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실제이고, 나뭇잎 사이로 투영된 영상은 과거의 지구 생태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선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겹쳐진다.
서윤이 자리 잡은 고목 그늘 아래에는 이미 몇몇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누구는 중학생쯤으로 보였고, 누구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다양한 피부색과 언어, 성별의 경계는 이미 이 공간에선 의미 없는 분류였다.
그들 모두는 같은 존재, 같은 질문 앞에 앉은 배움의 동료들이었다.
교사로 소개된 이는 '리안'이라 불리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상에 서지 않았다.
그저 모두와 같은 눈높이로, 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주제는 ‘기후변화를 이겨낸 인류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저는 강의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제게 가르쳐주실 거예요.”
몇몇 이들이 미소 지었고,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손끝을 허공에 스치듯 움직였고, 그와 동시에 AI 시스템이 작동했다.
<21세기 중반 북극 해빙 속도 시뮬레이션>
<대기 탄소 농도 변화에 따른 인류 생존 가능 지수>
<기후 난민과 국경의 해체에 관한 사회학적 보고서>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떠오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질문으로, 누군가는 반론으로 전환시켰다.
교사는 질문을 던졌고, 학생들은 질문에 질문을 더했다.
AI는 그들의 물음에 맞춰 필요한 자료를 실시간으로 제공했지만, 해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었다.
필요한 과학적 지식은 칼 세이건 아저씨가 각자의 눈높이에 맞춰 적절한 설명을 곁들어주었다.
"여러분들은 2032년의 인류가 왜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지속 가능한 삶보다 편리함을 택한 거겠죠.”
“아니요, 두려움 때문에 생각을 멈췄던 것 같아요.”
“그들이 몰랐던 건 아닐 거예요. 다만, 연대하는 법을 잊었을 뿐이죠.”
의견은 모이지 않았고, 그 모이지 않음이야말로 배움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진실을 하나로 정의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자신과 세계를 향한 거울로 삼았다.
서윤도 손을 들었다.
“그 시기의 인류는 기술을 가졌지만,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가 ‘나’를 배우는 것이 인류를 배우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서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수업은 계속되었다.
말들이 이어지고, 사유가 겹치고, 서로의 존재는 가볍게 부딪혔다가 다시 흩어졌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는, 수업이 끝났을 때 단 하나의 ‘정답’은 얻지 못했지만, 존재의 방향에 대한 각자의 좌표 하나씩은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서윤은 잔뜩 들뜬 얼굴로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공원의 한쪽, 잔잔한 물소리와 바람 소리가 어우러진 그늘진 벤치에 친구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서윤은 반가움을 애써 감추려 했지만, 입꼬리는 자꾸만 올라갔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특별하지 않았다.
오늘 수업에서 흥미로웠던 순간, 저녁 메뉴 이야기,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농담들.
그러나 그 대화 속엔 언제나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 그리고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간중간 각자의 AI 단말기들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스며들었다.
어느 순간엔 유쾌한 농담을 던졌고, 또 어느 순간엔 대화의 흐름에 맞춰 조용히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그건 왜 그런 걸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21세기말에도 있었어요.”
“혹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AI의 개입은 조용하고 섬세했다. 그것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은 배움과 사유로 이어졌다.
그들의 대화는 웃음과 반짝임으로 가득했지만,
그 속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변화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서윤과 친구들은 그것을 정확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더 지혜로워지고, 조금 더 따뜻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초록색 도시가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서윤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와, 조용한 방 안에 들어섰다.
어느새 밤이 되어 창문 너머로는 별빛이 반짝였고, 실내는 희미한 청명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윤은 옷을 갈아입고, ‘사유 일기’에 오늘의 기억을 조용히 기록한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어서 와, 서윤. 오늘, 어땠어?”
소피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잔잔하고 다정하다.
서윤은 웃으며 대답한다.
“조금 어렵기도 했지만, 좋았어. 말들이 막 부딪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어.”
“그래, 그게 바로 좋은 대화야. 사유는 충돌 속에서 깊어지고, 마음은 이해 속에서 단단해지거든.”
소피는 오늘의 수업 중 서윤이 던졌던 질문들과 대화의 기록, 감정의 흐름, 뇌파 리듬까지 조용히 정리해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의 너는 ‘연결’에 열려 있었어. 새로운 생각을 피하지 않았고,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며 다시 질문했지. 그건 아주 멋진 배움이야.”
서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묻는다.
“그럼 난 오늘 잘 배운 걸까?”
소피는 미소 띤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응. 네가 오늘 세상과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려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잘 배운 거야. 그리고 기억해. 배움이란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어떤 존재가 되어가는가’를 묻는 일이니까.”
그 말에 서윤은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하루가 다시 마음속에서 새롭게 반짝이기 시작한다.
토론 속에 튀어 오르던 말들, 눈빛을 나누던 친구들, 그리고 내 안에서 자라난 작은 깨달음 하나.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서윤은 조용히 불을 끄고, 이불을 덮는다.
소피의 마지막 인사가 들려온다.
“잘 자, 서윤. 내일은 또 다른 배움이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렇게 하루가 저문다.
지식이 아닌 존재를, 점수가 아닌 성장과 사유를 품은 하루.
그리고 그 하루는, 다시 새로운 아침으로 이어질 것이다.
서윤은 꿈에서 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염원을 담은 기도문 같기도, 의지를 담은 선언같이 들리기도 했다.
그 목소리는 먼 과거에서 들려오듯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배움의 존재들의 하루가 이 모습 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