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하는 인간

4-2. 정보보다 높은 사유(2)

by 더블윤


아모르 파티.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이다.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은 말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니체가 사랑하라(아모르, Amor) 했던 대상은 ‘Party’가 아니라, 운명을 뜻하는 라틴어 ‘Fati’였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하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괴로워하며, 충족되면 이내 허무에 빠진다.
이처럼 인간은 욕망과 허무 사이를 끝없이 왕복하는 존재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통찰이었다.

니체도 삶이 고통스럽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은 쇼펜하우어와는 전혀 달랐다.
니체에게 고통은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었다.


“고통 그 자체는 고통이 아니다.
고통에 대한 해석이 고통을 만든다.”


즉, 고통은 해석되기 전까지는 중립적이다. 그것을 삶의 저주로 해석할지, 혹은 삶의 증거이자 가능성으로 받아들일지는 인간의 몫이다. 니체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의 철학에서 등장한 말,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이 말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삶의 고통뿐 아니라 실수, 후회, 심지어 지나온 모든 상처까지도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는 선언이다.
이것은 체념이나 순응이 아니라, 강렬한 생의 긍정이다. 다시 말해, 니체는 삶이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하더라도, 그 고통은 지워야 할 과거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현재의 일부라고 본 것이다.


그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고통이란, 우리 삶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리고 지금 이 사람은, 그것이 사유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이토록 주저리주저리 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려는 걸까?




‘고통’은 위대한 인간을 만든다


니체는 인간이 변화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다시 말해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고통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고통은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인간을 단련시키고 형성하는 결정적인 힘이며, 기존의 자아를 깨뜨리고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초인'이라는 개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초인이란 단지 강하거나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직면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재창조할 수 있는 자율적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니 니체의 '초인'은 고통 위에 선 자다. 그는 고통을 원망하지 않으며, 고통을 자기 정화와 창조의 도구로 삼고, 의미를 스스로 만드는 인간, 즉 신의 부재 속에서도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나는 너희에게 고통을 가르친다. 진정한 해방의 길이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있어 고통은 타성적인 자아를 해체하는 도끼이며,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하는 불이었다.


“인간은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마음속에 혼돈을 품어야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이 말은 단순한 근성을 가지라는 외침이 아니다. 그는 고통이야말로 인간의 약함과 허위를 벗겨내고, 진정한 자기로 변모하게 하는 과정이라 보았으며, 그것이 가진 변화의 힘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고뇌, 그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사유


정신이 겪는 고통을 우리는 흔히 '고뇌'라 부른다.
고뇌의 사전적 정의는 깊은 괴로움과 번민 속에서 인간이 정신적으로 겪는 고통을 의미한다. 주로 불교적 맥락에서 사용되며, 외부의 고통보다는 존재, 삶, 의미, 선택 등에 대한 내면의 갈등과 번민을 포함한다.
고뇌는 보통 ‘의식 있는 존재’가 삶의 모순과 갈등을 자각할 때 발생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통인 만큼, 육체적 고통이 고뇌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환경적인 영향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으며, 그 환경에 대한 인식을 통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고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뇌가 일어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간극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고, 선택과 책임의 무게가 고뇌를 유발하기도 한다. 또는 타자와의 관계적 긴장이나, 근본적인 삶의 의미, 그리고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에 대한 질문 등이 존재의 고뇌를 일으키곤 한다.

이러한 고민들의 핵심에는 고통, 상실, 혼란 같은 감정들이 담겨있다. 실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처럼, 불편함과 고통은 회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요구하는 신호’가 된다.

즉, 고뇌라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사유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자각하게 되며,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묻고 상상하게 된다.


고뇌가 어떻게 변화를 요구하게 되는지를 하나의 예를 통해 살펴보자.


어느 30대 중반의 직장인은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 지친 표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과 회의감은 그의 마음을 점점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일까?”
“다른 길을 걸어볼 수는 없을까?”

그 질문은 처음에는 불편함이었다. 지금껏 쌓아온 안정된 삶을 흔드는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점점 깊은 고뇌로 바뀌었다. 생각으로 가득 찬 밤을 지새우며, 그는 마침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변화의 신호를 느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삶과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예시 속 남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변화를 요구하는 고뇌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오래된 기억과 가능성을 다시 떠올리게 했고, 그는 아주 작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글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오래전 그의 꿈과 맞닿아 있는 결심.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시작된 변화였다.

그리고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건 바로, 그 남성이 나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뇌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




불편함과 고통 앞에서 인간은 니체가 말한 초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의 정신이 그러한 고통 앞에서 선택하는 행위는, '자기 보기'이자 곧 '성찰'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행위가 곧 변화의 시작이 된다. 변화는 곧 배움이라 하였으니 고뇌는 변화의 동력이자, 배움의 동력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편함과 고통을 회피하고, 편안함과 안락함 속에 머물고자 한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배움보다는 무의식적인 습관을 택한다.
하지만 어쩌면 불편함을 회피하는 삶엔 도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을 외면하는 삶엔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오직 그 불편함과 고통을 감내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초인은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때문에 고뇌는 사고를 멈추지 않게 만들고, 깊은 배움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단순히 고통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므로 고뇌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확장시키는 과정이다.

깊은 생각은 필연적으로 내면의 갈등과 마주하게 한다. 고뇌는 불편하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실존적 사유의 형태다.
고뇌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원하며,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변화는 ‘고뇌를 통과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그리니 우린 고뇌라는 길고 고통스러운 터널을 담담히 나아간다.
때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 우리를 주저앉게 만들지만, 그 깊은 어둠을 지나 마침내 도달한 끝에는 ‘성찰’이라는 출구와 ‘변화’라는 빛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뇌하기를 멈출 수 없다.
그 고뇌 자체가 배움의 길이며,
그 고뇌 자체가 배움이기 때문이다.

"어서 오시게나. 아모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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