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010년대 초반의 군대의 모습임을 감안하고 감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군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훈련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누군가는 뉴스에 나오는 대규모 연합훈련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KCTC 훈련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병사들에게는 운이 따라야만(?) 참여할 수 있는 훈련이기에, 모든 이의 기억에 남는 훈련이라 하긴 어렵다.
이외에도 군인들에게는 수많은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일상적인 교육훈련부터, 익숙한 연례행사처럼 행해지는 각종 전술훈련, 그리고 혹한기 훈련처럼 혹독한 자연과 싸워야 하는 과정까지. ‘싸워 이기는 법’을 익혀야 하는 조직이기에, 이런 고된 훈련의 반복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훈련은 무엇이었을까?
떠올려보면 기억에 남는 훈련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도 선명하게 남은 경험이 있다.
바로, ‘유격훈련’이다.
유격훈련(遊擊訓鍊)
유격훈련의 ‘유격(遊擊)’은 적진에서 형편에 따라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뜻하므로, 곧 게릴라전에 필요한 훈련을 의미한다. 게릴라전 훈련이라 하면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쉽게 말해 대한민국의 국토 대부분이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산악 장애물을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훈련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기에 유격훈련장은 항상 산속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는 각종 장애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장애물은 줄타기, 등반, 터널 통과 등 다양하다. 사실 극심한 고소공포증이 있는 장병(그게 바로 나다.)이 아니라면, 남성성을 자극하는 일종의 종합 파쿠르 훈련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나도 높은 곳에 오르는 장애물만 아니라면,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묘한 재미를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유격훈련이 주는 진짜 고통은 산악 등반이나 각종 장애물 통과가 아니라, 바로 ‘PT체조’라 불리는 유격체조였다.
혹시 주변에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의 귀에 대고 다짜고짜 이렇게 외쳐보라.
“PT 8번(또는 11번) 준비!”
십중팔구, 욕설과 함께 PTSD를 호소하는 반응을 보게 될 것이다.
PT는 Physical Training(육체단련)의 약자로 원래는 미국 육군에서 채용한 체력단련 체계이다. 미군 교범에 있는 원본은 오히려 대한민국 국군보다 동작이 많다. 앞에서 했던 동작에서 쓴 신체 부위는 뒷동작에서는 좀 쉬게 만드는 등 나름대로는 머리를 썼기 때문에, 하는 사람은 죽도록 힘들게 느껴져도 몸은 계속 굴러간다는 것이 신기한 체조.
하지만 유격 조교들은 이런 사실 따위 안중에도 없다. 무의미하게 빡센 것만 골라 시키니 '육체단련'이란 본래의 목적은 망각되고 몸을 괴롭히는 용도로만 쓰인다. PT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쓸데없이 다리를 조지는 전근대적인 훈련법 두 가지를 조금 손보고 등 운동 하나만 넣어줘도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단련법이다. 그런데 체력단련보다는 가혹행위 수단으로 더욱 많이 애용되고, 각급 학교의 수련회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이 체조는 원래는 상술했듯 전체 동작을 순서대로 반복하면서 각 동작들로 유기적으로 몸의 곳곳을 단련하는 것이라, 힘들거나 틀리기 쉬운 특정 동작 몇 개만 쎄리 파면 몸이 죽어남은 당연하다.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라면 정석대로 전체 동작을 몇 번씩 반복시키는 것이 맞다.
별칭은 피똥체조. 피 튀고 이 갈리는 체조라든지 피나게 이 갈리는 체조라는 것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PT체조 뜻이 피(P)튀(T)기는 체조라는 얘기도 있다. PT가 Physical Training의 약자라는 것에서 착안하여 "사실 Physical Torture의 약자다"라고 하기도 한다.
- 나무위키 발췌
이 명칭에 대한 설명만 읽어도, PT체조가 얼마나 악랄한 훈련인지 감이 올 것이다.
PT체조 시간이 되면, 눈빛을 모자로 가린 조교들과 교관이 장병들 앞에 도열한다. 그리고 그들은 장애물 훈련에 앞서, 부상을 방지하고 신체를 단련하기 위한 체조를 실시하겠다고 말한다.
설명만 들으면 얼마나 훌륭한 취지인가.
하지만 실제로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이 체조가 신체 건강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신 건강에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앞에서는 교관과 조교가 1번부터 14번까지의 동작을 시범으로 보여주고, 그다음부터 ‘고문’이, 아니 PT체조가 시작된다.
처음엔 비교적 쉬운 동작으로 시작한다.
“PT체조 1번 10회! 몇 회?”
“10회!”
“목소리 봐라! 40회!! 몇 회?”
“40회!!!”
“30회. 시작!!”
유격훈련을 처음 겪는 후임병들은 여기서부터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몇 회지? 10회였나, 40회였나, 30회였나?'
다시 생각할 틈도, 옆 사람에게 물어볼 여유도 없다. 곧 교관의 호루라기 소리와 조교들의 고함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목소리 크게!!” “동작 똑바로 안 하지!?”
이 소리들 속에서 어느새 30회를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유격훈련장에서 절대로, 절대로! 해선 안 되는 행동이 하나 있다.
바로 마지막 반복 구호를 외치는 것이다.
“30!”
어딘가에서 울려 퍼진 마지막 구호.
그러면 곧바로,
“정신 안 차리지!? PT 8번 준비!! PT체조 8번 40회!”
바로 이렇게, 끝없는 지옥의 문이 열린다.
이런 체조가 4~5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4시간이 길다고?
걱정하지 마시라.
1시간만 해도 충분히 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에 쥐가 나고, 입가에는 침이 흐른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끝나지 않는 이 체조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동료들의 실수가 더욱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아무리 예수님, 부처님이 오신다 해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마지막 반복구호 소리를 들으면,
'ㅅㅂ 어떤 새끼야?'
라는 생각을 하실지도 모른다.
꾀를 부릴 수도 없다. 목소리가 작거나 동작이 부정확하면, 조교에게 열외 되어 PT 8번, 또는 11번을 무한 반복하거나, 혹은 끝나지 않는 선착순 달리기를 하게 된다.
그렇기에 체조가 반복될수록 분노와 증오가 속에서 끓어오른다. 나 역시 그날, PT 8번을 하다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아아악!”하고 긴 고함을 내지르기도 했다. 그건 분노조절 실패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정말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PT체조라는 신체 고문단련 시간이 마침내 끝나면, 그제야 허름하기 짝이 없는 텐트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때 나는 문득, 예전에 대학 선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바닥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싶었다.”
그제야 나는 그 선배의 말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내일을 향한 두려움을 숨길 수 없었다.
5일간의 유격훈련 일정 중,
지금은 겨우 첫째 날이 끝났을 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