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이번 회차는 기발행되었던 글을 일부 수정하여 <솜털보다 가벼운>에 편입시킨 글입니다. 기존에 감상했던 분들께 양해의 말씀 올립니다.
나는 지금도 내게 주어진 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면, 훈련소 수료 전 마지막 과제였던 그 밤의 행군을 떠올리곤 한다.
지금이야 행군이 그저 매년 반복되는 귀찮은 연례행사 중 하나로 느껴지지만, 훈련소에서 처음 경험한 그 행군은 내게 가장 고된 훈련이자, 가장 깊이 각인된 값진 경험이었다.
2013년 봄, 벚꽃 잎이 모두 떨어져 가던 무렵, 나는 논산 육군훈련소의 한 훈련병이었다. 당시 50kg을 조금 넘는 왜소한 체격은 훈련 기간 내내 내 발목을 붙잡았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의지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벽에 여러 번 부딪쳤다.
그런 나에게, 그날 밤의 40km 야간 행군은 그 어떤 훈련보다도 높고 험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동일한 품목이 같은 순서로 차곡차곡 들어가 있는 군장 배낭의 무게는 모든 훈련병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같은 무게라도, 내겐 그것이 태산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동계 기준 완전군장의 무게는 30kg이 넘는다. 우리가 훈련을 받던 계절은 여름이었고, 야전부대 수준의 장비를 모두 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군장은 25kg에 육박했다. 내 체중의 절반에 가까운 무게였다.
그 군장을 어깨에 메자 숨쉬기조차 벅차올랐지만, 나는 다시 한번 내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막사를 나서 연병장에 집결한 우리는, 힘찬 구령에 맞춰 밤길로 행군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우리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남아 있었고, 소곤소곤 잡담을 주고받을 여력도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차가운 공기 속에서, 점점 무거워지는 발걸음과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손에 쥔 3kg 남짓한 총기의 무게조차 이제는 벗어던지고 싶은 멍에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볼 여유조차 없이, 희미하게 비치는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응시한 채 더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다리를 간신히 끌어당기며 대열을 따라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굽이굽이 시골길은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만들었고, 그 불안이 내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우리에게 ‘대휴식’이라 불리는 긴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30분 남짓 주어진 그 시간 동안 훈련병들은 지급된 건빵이나 에너지바를 씹으며 허기를 달래거나, 여분으로 챙긴 양말을 갈아 신으며 다음 구간을 대비했다.
나도 떨리는 손으로 전투화를 잡아당겨 간신히 벗어냈다. 땀에 흠뻑 젖은 양말을 벗자, 진물과 함께 끈적해진 발바닥의 표피가 양말에 달라붙어 벗겨져 나갔다. 엄지발가락 아래, 주먹만 한 물집은 이미 터져 있었고, 그 주위의 살갗은 너덜너덜하게 갈라져 있었다.
터덜터덜 분대장에게 다가가 보고한 뒤, 반창고와 드레싱용품을 받아왔지만, 문제는 상처가 아니었다.
진짜 나를 꺾고 있던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할 수 있다’ 던 확신이 ‘나는 이제 할 수 없겠구나’라는 체념으로 바뀌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군장을 다시 메었지만, 남은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근육은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고, 마디마다 뼈가 부딪히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오히려 잠시의 휴식으로 감각이 되살아난 몸은, 고통이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뇌로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래,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라고 스스로 중얼거리며, 다시 일어서기를 포기하려던 그 순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이 다시 일어섰다. 내 앞뒤에서 함께 걷던 동기들이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그들은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으... 쪽팔리게 엠비(엠뷸런스) 타고 갈래?”
한 동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미쳤어? 달릴 수도 있거든?”
나는 억지로 허세를 부리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내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모두가 내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행군이 시작됐다.
여전히 밤은 깊었고, 남은 길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앞사람은 자신의 군장을 잡고 갈 수 있도록해 나를 끌어주었고, 뒤에서는 내 군장을 받쳐 올려 나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 순간, 내 발걸음은 조금씩 다시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점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군악대의 나팔소리가 우리의 걸음을 재촉했다. 다리엔 다시 힘이 솟았고, 얼굴엔 비로소 미소가 피어올랐다.
훈련소가 위치해 있는 연무대 안의 주도로로 진입하자, 우리는 2열 종대로 간격을 좁혀 행군을 이어갔다.
그제야 우리 중대뿐 아니라, 이 여정을 함께한 수많은 대열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쳤다. 지쳐 있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오히려 여유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행군 간에 군가 한다! 군가는 육군! 훈련소가!”
“육군! 훈련소가!”
“더 크게! 육군! 훈련소가!”
“육군!! 훈련소가!!”
“군가 시작! 핫! 둘! 셋! 넷!”
“백제의! 옛터전에—!”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찬 목소리로 군가를 불렀다. 척척 맞아떨어지는 군화의 발소리가 대열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연병장에서 우리를 위해 연주를 이어가던 군악대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는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국, 눈가에 눈물이 고였었다.
그리고 그날, 우리 중대는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군악대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기나긴 행군을 완주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눴다. 모두가 완주의 희열 속에, 서로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오래전의 이야기가 된 훈련소의 행군.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의 행군을 어제 일처럼 선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군 생활이라는 것은, 아니—
결국 우리의 삶 그 자체가 행군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내게는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로 다가올 때가 있다.
목적지까지의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주변엔 아무도 없는 듯 깜깜한 밤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문득,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인가 의심하게 되고, 스스로 한계를 정해버린 채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함께 걷는 전우가 있고, 동료가 있고, 가족이 있기에 우리는 끝내 해낼 수 있다.
기나긴 행군의 대열 속에는 맨 앞에서 길을 개척하며 방향을 제시하는 첨병이 있고, 중간중간 낙오자가 없는지 살피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무거운 군장을 버겁게 짊어지고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남은 힘을 모아 그를 밀고 끌어준다.
결국 이들이 모여 만드는 행위가 바로 ‘행군’이다.
행군은 이처럼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함께 걷는 길이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라도 혼자였다면 결코 완주할 수 없었을 그 머나먼 길을 끝내 걸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혼자라고 느꼈던 그 길에는 이미 앞서 걸어간 인생의 선배들이 남긴 발자국이 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언제나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저 우리의 짐이,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못했을 뿐이다.
나와 나란히 걷고 있는 그들은 동료일 수도, 친구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그들이 결코 나의 버거움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다.
우리 곁에는 늘 함께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결국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점점 밝아오는 하늘 아래,
내가 걸어온 길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성공의 나팔소리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음을.
그러니 다시 일어나자.
인생의 행군에서 지금 어둠 속에 주저앉은 이여,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니,
다시 일어나 앞을 보고, 나아가자.
저 멀리서—
여명의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