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위계와 질서가 짙게 깔린 공기 속
고성과 욕설이 일상의 대화가 되고
명령과 복종만이 전부인 그곳에서
우리의 감정은 과연 어디로 향할까
자대에 처음 전입했을 당시, 서 상병은 수많은 선임들 가운데서도 유독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 굳게 닫힌 입술. 그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고, 작은 감정 표현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그야말로 목석같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이등병 시절, 수많은 선임의 얼굴과 관등성명을 외워야 했지만 유독 서 상병의 얼굴과 이름만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같은 분대의 선임이었음에도 말이다.
어느 날, 동기들과 함께 서 상병의 생활관에 호출당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의 침상 앞에 일렬로 서 있었지만, 그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TV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를 꾸짖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와 동기인 다른 선임이었다. 그리고 생활관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서 상병은 단 한 번도 우리를 향해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등병이었던 우리는 그런 서 상병을 어렵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무심함으로도, 혹은 분노를 애써 억누르는 얼굴로도 보였기 때문이다.
일병 계급장을 달고, 어느 정도 선임들과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서 상병과는 거의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 이등병 시절엔 무섭게만 보이던 그가 이제는 그저 무심한 사람으로만 보였을 뿐, 우리 사이의 관계는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군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에는, 나에게 그 사람은 단지 ‘재미없는 선임’이 되어 있었다.
그랬던 그와 내가 연결된 계기는 뜻밖에도 ‘노래’였다.
나는 원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엔 거의 모든 부대에 코인 노래방 기계가 있었고, 그것은 장병들에게 소중한 휴식공간이 되어 주었다. (지금은 사라졌다. 나는 이것이 국방부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등병 때부터 틈틈이 노래방에 들렀고, 일병이 된 뒤로는 선임들이 내가 노래를 잘 부른다며 노래방에 데려가 노래를 시키곤 했다.
노래를 좋아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 상황은 불편했다. 내키지 않을 때조차 선임들과 함께 가서 노래를 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아마 그즈음, 내가 노래를 잘한다는 이야기가 서 상병의 귀에도 들어갔던 모양이다.
캄캄한 밤, 나는 초소 근무를 나가게 되었고, 그날의 사수는 서 상병이었다. 늘 그렇듯 아무 말 없이 근무를 서고 있을 때,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OO야, 너 노래 잘한다며?”
“일병 이OO! 잘 못 들었습니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아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의 서 상병이 있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너 노래 잘한다며?”
“아닙니다. 그냥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다시 초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서 상병님도 결국 나한테 노래를 시키려는 거구나.’
지금까지 수많은 선임들이 그랬듯이, 그도 똑같이 행동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나 노래 잘하고 싶어. 노래 잘하는 법 좀 알려줘.”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눈빛만큼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와 한참 동안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발성이나 호흡등, 그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을 최대한 끌어냈다.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으십니까?”
내가 물었다.
“아이유.”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뜻밖이었다.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아이유 노래 중엔 뭐 좋아하십니까?”
“Rain Drop.”
“한번... 불러보시겠습니까...? 제가 한번 봐드리겠습니다.”
무례한 부탁일 수도 있는 내 말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목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Oh Rain Drop, Oh Rain Drop, 사랑이 참 모자라구나…
Oh Rain Drop, Oh Rain Drop, 사랑은 저 빗방울처럼…”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서 상병의 일정한 톤의 걸걸한 목소리와 아이유의 부드러운 멜로디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노래는 마치 바닥에서 의자를 질질 끄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야, 왜 웃어? 이상해?”
“아, 죄송합니다. 그… 노래하실 때 너무 책 읽는 것 같으십니다.”
“너가 말하듯이 부르라며.”
“그, 너무 힘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시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뒤로 나는 그의 음정과 박자를 짚어주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노래를 연습시켰다.
그날 밤의 초소는 그렇게 두 사람의 노랫소리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서 상병과 나의 웃음소리가 함께 머물러 있었다.
정말 웃기게도, 막사 안에서의 서 상병은 또다시 무표정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돌아갔다.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초소 근무를 함께 설 때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통해 서서히 ‘그’라는 사람을 알아갔다.
(노래를 잘하진 못했지만)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
책 읽기와 사색을 즐기며,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누군가와 부딪히는 일도, 화를 내는 일도 원치 않는 평화주의자 같은 사람.
이젠 그의 무관심이 이해되었고,
이젠 그의 미소가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초소에서 노래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가끔 그를 연습시켰다.
그리고 그러한 나날들이 반복되어 오던 어느 공기 좋은 밤이었다.
“오늘 하늘 맑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찍찍’ 소리를 내며 야간투시경 보관 주머니를 열더니, 안에 든 장비를 꺼내 들었다.
“OO아, 이걸로 하늘 한번 봐봐.”
그가 내게 건네며 말했다.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든 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서 봐봐’ 하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야간투시경을 캄캄한 하늘을 향해 들고,
조심스레 접안렌즈에 눈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인생에서 본 별 중 가장 많은 별을 보았다.
맨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희미한 별들까지,
초록빛의 벨벳 위에 빼곡히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은 마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 별들은,
곧 우리 모두였다.
어쩌면 서 상병은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희미한 별 같은 사람이었다.
분명 존재하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
그러나 누구보다도 따뜻한 빛을 품은 사람.
군대라는 차가운 조직 속에서, 그의 감정은 가장 깊은 곳에 숨어 빛을 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숨겨진 빛을 볼 수 있었던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그 밤하늘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서 상병의 이름은 '서정O'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군대에서 만난 그 누구보다 가장 ‘서정적(抒情的)’이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