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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 下

# 28

by 더블윤

2010년대 초반의 군대의 모습임을 감안하고 감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다시 유격훈련장.

겨울이 아님에도 산속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다. 첫째 날 땀에 절어버렸던, 이른바 CS복이라 불리는 유격훈련용 전투복을 다시 입자, 불쾌한 땀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몸이 보내오는 고통의 신호에 비하면 그런 불쾌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딱딱하고 불편한 바닥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전날 무리했던 근육들이 하나같이 뭉쳐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아침의 시작은 어김없이 PT체조였다.
참 신기하게도 도저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근육들이 PT 시간이 되자 반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첫째 날, PT체조 동작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몇 배의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을 몸소 배웠기에, 그것은 아마도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한 ‘몸의 방어 본능’이었을 것이다.

PT체조라는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면, 그제야 장애물 극복 훈련이 시작된다.
유격훈련장 산속 곳곳에는 각종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모든 장병들은 팀을 나눠 산속을 뛰어다니며 각 코스를 한 바퀴씩 돌아야 했다.

문제는 이동 방식이었다.
유격훈련장에서의 ‘이동’은 언제나 달리기였다. 말 그대로 매 순간 뛰어야 했다. 그것도 무릎을 가슴높이까지 올리면서... 이동 중 대열이 흐트러지거나, 무릎이 조금이라도 낮게 올라오면 그 자리에서 바로 PT체조가 이어졌다.
그러니 장애물로 이동하는 순간조차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그놈의 PT체조는 유격훈련 내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동할 때도 PT, 대기할 때도 PT, 얼차려도 PT...
유격훈련의 꽃은 단연 PT체조라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계속된 PT로 인해, 나는 훈련소 때의 행군 이후로 처음으로 ‘육체적 한계’라는 것을 느꼈다.

포기하고 싶고, 편해지고 싶었다.




라떼는 이라 해야 할까…
그 시절의 군생활 속에서 후임병의 ‘아픔’은 거의 ‘죄’에 가까웠다.

“아직 상병도 안 단 애가 열외를 해? 군대 많이 좋아졌네?”

매일 아침마다 이루어지는 구보 시간, 만약 이등병이나 일병이 몸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구보를 열외하게 되면, 위와 같은 시선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니 후임병에게 ‘아프다’는 건 분대장(선임병)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병원에서 누가 봐도 신체를 움직일 수 없다는 진단이 나오지 않는 이상, 아픈 티를 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단순 감기 같은 진단명은 곧 ‘꾀병’이 되었고, 뼈가 부러지거나 하지 않는 이상 “병원 좀 가야겠다”는 말은 꺼내기조차 어려웠다.

나 역시 상병을 단 이후에야 군 생활 중 처음으로 외진을 신청하여 군 병원을 가게 되었었다. 너무 늦게 방문한 탓이었을까, 가벼웠던 허리 통증은 이미 디스크로 발전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군대의 문화나 분위기를 원망하진 않았다. 그 시절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도 허리가 자주 아프긴 하지만, 일상생활이나 군 생활을 이어가는 데에는 큰 지장은 없다.)

나는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 이유는, 우리가 처했던 환경은 ‘열외할 수 없는 환경’, 즉 ‘포기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러한 이유로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후임병의 위치였던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야만 했다. 선임병들조차 꿋꿋히 버텨내고 있는 훈련을, 힘들다는 핑계로 열외할 순 없었다.




유격훈련장에는 독특한 구령이 있다.
모든 대답은 오직 “악!”으로 통일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동작마다,

“유. 격. 자. 신. 한. 계. 극. 복.”을 외쳐야만 했다.


구령에서 알 수 있듯이, 싸워 이겨내야 하는 대상은 ‘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고, 넘어서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한계’였다.

PT체조로 인해 몸은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각종 장애물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대부분 높은 곳에서 떨어질 것만 같은 공포였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선택지에는 ‘포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PT체조 중 고통에 신음을 하거나 고함을 질러도 괜찮았다.
장애물 위에서 한참을 망설이며 두 다리를 덜덜 떨어도 괜찮았다.
단 하나, 포기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결국 ‘유격훈련’이란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훈련이었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법을 배우는 훈련이었다.

우리는 매 순간, 몸이 보내오는 고통과 싸워야 했고, 유독 고소공포증이 심했던 나는 장애물 위에서 수많은 망설임과도 싸워야만 했다.

그 매 순간이 힘겨웠지만,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결국엔 해낼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

유격훈련이란, 그런 훈련이었다.




요즘에도 유격훈련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다만 그 강도는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완화된 편이다.
현재의 유격훈련은 실질적인 장애물 극복 중심의 훈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육체적 한계를 느끼게 만들던, 다시 말해 ‘괴롭히기식’ PT체조는 대부분 지양되고 있다. PT체조의 반복 횟수가 대부분 20회 미만이라는 점만 보아도, 이러한 변화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군의 문화 또한 매우 긍정적으로 변했다. 이제는 누구나, 계급에 상관없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어떤 간부도 병사들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 심지어 “꾀병도 병이니, 그 소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온다.
(오히려 예전의 고된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요즘의 병사들이나 젊은 간부들 중 일부가, 후임병들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는 몰지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내가 보기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격훈련은 여전히 힘든 훈련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제는 ‘힘들면 그만둘 수도 있다’는 명확한 선택지가 생겼다.
그래서일까, 나는 달라진 유격훈련을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의 삶 속에도 넘기 어려운 장애물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장애물 앞에서 우리는 종종 한계를 느낀다. 때로는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도중에 포기해 버린다면, 그 장애물 앞에 설 자격조차 스스로 잃게 된다. 내가 이 장애물까지 올 수 있었는지, 또는 넘을 수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끝까지 시도해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해 버리는 셈이다.

내게 유격훈련은, 내가 가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훈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신체적 능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이루어낼 수 있다.


유격훈련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첫 행군에서 느꼈던 것처럼, 유격훈련이 내게 남긴 가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때로는 너무 높고, 때로는 너무 험해 보여서 그 앞에서 겁먹고 돌아서 버리곤 한다. 쉽고, 편하고, 빠른 길만을 고집하며 말이다.

하지만 장애물을 넘어선 나는, 그 이전의 나와는 분명히 다르다.
조금 더 단단해졌고, 조금 더 담대해졌으며, 조금 더 성숙한 내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넘어서는 삶’을 지향하길 바란다.
당장의 편안함보다, 성숙과 성장을 향한 삶이 되기를 바란다.


유격자신. 한계극복.


그날,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외쳤던 그 구호는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반복되며, 우리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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