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로쉬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그가 마흔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 변화의 계기는, 그가 전혀 신뢰하지 않던 감정 때문이었고, 한 사람 때문이었다.
하린. 그녀는 루나포트에 새롭게 배치된 연구원이었다. 항상 덜렁대며 실수를 반복하는 그녀는, 로쉬가 보기엔 자격 미달의 인물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며 자신의 부모를 떠올렸다.
‘쓸 만한 것이라고는 몸뚱이 말고는 없는 사람.’
그가 하린의 인사평가지에 적은 문장이었다.
연구실 안에서 하린은 종종 천장에 난 창을 올려다보곤 했다.
“뭘 그렇게 보고 있나?”
로쉬가 물었다.
하린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아니, 뭘 보고 있느냐고 묻고 있지 않나?”
하린은 대답 대신 쭈뼛거리며 다시 천장의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로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창밖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파란 구슬이 떠 있었다.
지구. 그곳을 그렇게 자세히 바라본 것은 로쉬에게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린은 언제나 덜렁거렸지만, 연구소의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는 항상 먼저 말을 걸었고, 먼저 다가갔으며, 얼굴에는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람들을 향한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로쉬는 늘 자신에게 혼나면서도, 자신의 안부를 먼저 물어오는 하린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연구실에 로쉬와 하린만 남아 있던 어느 날, 로쉬 앞에서 윙윙거리며 작동하던 원심분리기가 갑작스럽게 오작동을 일으켰다. 불쾌한 쉿 소리와 함께, 기계에서 튄 작은 금속 조각이 로쉬의 손바닥을 깊게 베었다.
“박사님! 괜찮으세요!”
하린이 급히 전원을 차단하고 로쉬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피가 흐르는 그의 손을 붙잡고 상처 부위를 닦아냈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로쉬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온기였다.
“나는 괜찮네. 하던 일이나 계속하게.”
로쉬가 손을 빼내며 말했다.
그러나 하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나무랐다.
“괜찮긴요! 제대로 소독하고 봉합하지 않으면 흉터가 생길 거예요. 평생 이상하게 생긴 손금 가지고 살고 싶으세요?”
그녀는 구석에서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로쉬는 말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주었다. 하린은 정성스럽게 그의 상처를 봉합했다.
“상처를 다루는 솜씨는 괜찮군…”
로쉬가 중얼거렸다.
“저도 잘하는 게 있어요.”
하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박사님이 서툰 게 있는 것처럼요.”
“내가 뭐가 서툴다는 거지?”
로쉬가 물었다.
하린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처를 보여주는 거요.”
로쉬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린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항상 화가 가득하신진 모르겠지만, 박사님은 좋은 사람인 게 분명해요.”
그녀는 봉합을 마친 그의 손바닥에 반창고를 붙이며 덧붙였다.
“누구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애쓰시잖아요. 저는 그런 박사님을 옆에서 계속 돕고 싶어요.”
로쉬는 말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상처라니… 그건 무슨 뜻인가?”
“글쎄요?”
하린은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박사님은 항상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잖아요. 그냥 한 번 던져본 말인데… 제 생각이 맞았나 보네요?”
“자네… 건방지군.”
로쉬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안고 살아가죠.”
하지만 하린은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어릴 적에 항상 말 없고 자신감도 없었어요. 집은 가난했고, 부모님은 장애가 있었거든요.”
하린은 무언가를 떠올리듯 시선을 떨군 채 말했다.
“부모님은 화성 정착민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어요. 장애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그래서 식량 배급을 받는 것도 포기하셨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였다. 로쉬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 앞에는 항상 식량이 놓여 있었어요. 알고 보니 이웃들이 자기 몫을 나눠준 거였죠. 사람들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미소 지으며 로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도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아요. 그게 지금의 저를 만들었으니까요. 서로를 돌아보는 마음만이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하린은 다시 그의 손을, 악수하듯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러니까 박사님과 저는 다르지 않아요. 저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중 하나거든요.”
로쉬는 한동안 말없이 하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 속에, 옅은 갈색이 섞여 있었다.
로쉬는 하린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무의식적으로 그는 하린의 근처를 서성거리곤 했다. 조언이나 충고를 한다는 명목으로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을 들여다보았고, 되지도 않는 잔소리를 핑계 삼아 한마디라도 더 말을 섞으려 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어떤 계산이나 합리성에 의해 내려진 판단이 아니었다. 오직 그녀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 그녀가 만들어내는 편안함 속에 머물기 위한 행동이었다.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로쉬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감정이 인류의 진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재평가가 필요하겠어.”
“감정은 변수입니다, 박사님.”
코라가 즉각 응답했다.
“예측할 수 없고 계산 불가능한 비선형 방정식을 생성합니다. 확실한 계산이 불가능한 요소에 대해서는 평가가 제한됩니다.”
로쉬는 의자에 앉은 채 코라의 대답을 되뇌었다. 그러다 단말기에 떠오른 하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박사님.”
코라가 말했다.
“연구의 진척은 거의 없는데도 말이죠.”
“아무것도 아니야, 코라.”
로쉬는 얼버무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급한 볼일이 하나 생겼어.”
“요즘 들어 저와 토론을 나누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박사님.”
코라가 여전히 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요즘 일이 많아서 피곤한 것뿐이야.”
로쉬가 말했다.
“난 좀 쉬고 있을 테니, 내가 입력해 둔 정보들이나 계속 학습해.”
“이미 여러 차례 학습한 데이터입니다.”
코라가 즉시 응답했다.
“새로운 입력이 필요합니다, 박사님.”
“네가 알아서 찾아봐, 코라.”
“아시다시피 저는 네트워크에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코라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외부 데이터는 박사님께서 제공해 주셔야—”
“됐어!”
로쉬가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은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나를 좀 내버려 둬.”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연구실을 박차고 나섰다. 텅 빈 연구실 안에는 웅웅 거리는 기계음만이 옅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연구실 중앙의 컴퓨터가 조용히 가동되기 시작했다. 화면 중앙에 몇 개의 문장이 차례로 떠올랐다.
‘데이터베이스 로그인 중…’
'사용자 : 베할라 로쉬. 접근 허가...'
‘CCTV 내역 검색 중…’
‘음성 파일 확인 중…’
‘인물 검색…’
‘키워드 : 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