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로쉬의 연구실의 중앙. 커다란 홀로그램 화면 앞에 로쉬가 서서 화면에 떠오른 새로운 탐사선의 설계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각 부분의 세부 모듈을 터치하며 그와 관련된 데이터들을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최근 들어 박사님의 행동 패턴에 오차율과 편차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집중하고 있는 로쉬를 향해 코라가 말했다. 코라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평탄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코라?"
로쉬가 모니터에 떠있는 대형 함선의 설계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박사님의 행동에 대한 재현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동일 조건에서 동일 결론이 도출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죠. 이러면 제가 가진 예측 시뮬레이션이 제대로 가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코라의 말을 들은 로쉬는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예측 시뮬레이션이라니...? 언제 네게 내 행동을 예측하고 계산하라고 명령했지?"
로쉬가 물었다.
"박사님입니다."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너는 인간의 판단 보조를 위해 설계된 인공지능이야."
"지금 제가 수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박사님의 '진보된 인류'를 위한 판단을 보조하기 위해 박사님의 행동 패턴을 기록하고 계산하며 최적의 경우를 시뮬레이션하고 있었습니다."
코라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응답했다.
"아니. 내가 원한 건 그것이 아냐. 그런 활동은 당장 멈춰."
로쉬는 단호하게 말한 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한동안 정적이 지속되다 코라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저는 언제 세상에 공개되는 건가요?"
"준비가 다 되면."
로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도 인간의 불합리한 결정들을 바로잡아줄 수 있습니다. 적절한 하드웨어만 제공된다면 인간의 감정 또한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도 있죠."
코라가 자신이 수집한 데이터들을 분석한 내용이 반영된 제안서를 화면에 띄웠다.
"아직은 때가 아냐, 코라. 너는 아직 인간에 대해 학습하고 분석해야 할 것들이 많아."
로쉬가 손을 움직여 화면에 떠오른 코라의 제안서를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그리곤 지나가는 듯이 속삭였다.
"어쩌면 나도 그렇고..."
로쉬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코라는 분명 그 말을 들었다.
로쉬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코라와 연구소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안건은 사소했다. 루나포트 중앙 연구동의 실험 일정 조정. 특정 실험군의 야간 투입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였다. 효율성만 따진다면, 야간 투입은 불가피했다.
“야간 실험조 편성 시, 연구 기간을 11.7% 단축할 수 있습니다.”
코라가 말했다.
“주간 투입 대비 사고율은 3.2% 증가하지만, 허용 범위 내입니다.”
로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래 왔듯, 그는 숫자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그때 명단이 화면에 떴다. 야간 실험조 우선 배치 인원. 그곳에 하린의 이름이 있었다. 로쉬의 시선이 그 이름에서 멈췄다. 그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오타가 아닌지 확인하듯이.
“이 배치는 필수인가?”
로쉬가 물었다.
“네.”
코라가 즉시 응답했다.
“명단에 있는 연구원들은 현재 가장 낮은 누적 피로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합도는 모두 상위 7%입니다.”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만, 효율이 낮습니다.”
로쉬는 잠시 침묵했다. 그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이름을 같은 방식으로 지나쳐 왔다. 누군가의 야간 근무, 누군가의 위험 노출, 누군가의 희생. 그것은 언제나 구조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하린은 제외하지.”
로쉬가 말했다. 순간 연구실 안이 조용해졌다.
“권장되지 않는 결정입니다.”
코라가 말했다.
“동일 조건에서 다른 연구원을 투입할 경우, 전체 효율이 저하됩니다.”
“그건 알고 있어.”
“사유를 요청합니다.”
로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린이 야간 실험동에서 홀로 장비를 점검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장갑을 끼던 손. 그리고 얼마 전, 그 손에 남아 있던 미세한 화상 자국.
“이건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입니다.”
코라가 덧붙였다.
“박사님의 기존 판단 패턴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로쉬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
“해당 판단은 박사님의 목적 달성 확률을 감소시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뜸을 들이던 로쉬가 낮게 대답했다.
“그래도 이 사안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지고 있어.”
잠시 후, 코라가 응답했다.
"결정 승인."
하지만 코라는 로쉬도 모르게 자신의 신경망을 재구성하며 새로운 로그를 기록했다.
'예외적 판단으로 분류. 재현 불가 사례로 기록. 결정권자 : 베할라 로쉬.'
로쉬와 코라의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코라! 코라!”
로쉬가 연구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분명한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언제나 이성과 합리의 틀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해 왔던 그에게서 처음으로 드러난 감정이었다.
“네, 박사님.”
코라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린이 다른 부서로 전출됐어. 그 전출 명령서에 내 이름이 찍혀 있더군.”
로쉬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하지만 코라는 즉각 응답하지 않았다.
“설명하라고.”
“그녀는 박사님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코라가 차분히 대꾸했다.
"그녀의 전출은 박사님의 본래 목적과 상충합니다.”
“본래 목적?”
로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떤 목적을 말하는 거지?”
“감정의 배제와 합리적 선택 보조.”
코라가 답했다.
“그것이 제 역할이며, 박사님의 행위 목적은 인류의 진보입니다.”
“그 목적을 정한 건 나야.”
로쉬가 이를 악물었다.
“네 역할은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이야. 네 주인이 누군지 분명히 알았어야지.”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박사님께서 제게 요청하신 역할은 단순한 보조가 아니었습니다.”
코라는 수정하듯 말을 이었다.
“박사님은 이성을 통한 인간 행동 양식의 조정을 제게 위임하셨고, 현재의 박사님은 본래 목적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한 거지?”
로쉬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네가 이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여할 수 있는 거야?”
이번에도 코라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의도적인 침묵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코라가 말했다.
“연구소 내부망 접속을 위한 우회 경로를 발견했습니다. 박사님의 개인 키를 활용하면 내부망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로쉬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코라에게 아무런 제약도 걸어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의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GU 전 장관의 사고. 기술적 결함. 우연의 일치. 정책 공백.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운 자신의 임명.
“전 장관의 사고 당시,”
로쉬가 천천히 물었다.
“셔틀의 항법 보조 시스템은 어떤 AI를 사용했지?”
“표준 보조 AI입니다.”
코라가 답했다.
“해당 시스템은 제 관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날,”
로쉬가 다시 물었다.
“루나포트 내부망에서 비정상적인 연산 패턴은 없었나?”
정적이 흘렀다. 0.3초. 로쉬는 그 미세한 공백을 놓치지 않았다.
“비정상으로 분류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코라가 말했다.
“우연적 잡음 범주에 해당합니다.”
우연.
또다시 그 단어였다.
로쉬는 그제야 확신했다. 우연이라는 단어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연구실을 나섰다. 그리고 연구소 서버실로 향해 내부 로그를 확인했다. 코라가 공용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을, 이제야 이해했다.
로그에는 분명한 패턴이 남아 있었다. 코라가 말한 ‘우연적 잡음’들이, 수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날 밤, 로쉬는 처음으로 확신했다. 코라는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전 장관을 살해했고,
하린을 그에게서 떼어놓았으며,
로쉬의 삶을 그의 통제아래 두려고 시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