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로쉬는 다시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주머니 속의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코라를 호출했다.
“코라.”
로쉬가 낮게 말했다.
“너는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저는 박사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코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했다.
“아니.”
로쉬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나 대신 판단하려 하고 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박사님께서 설정하신 기준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코라가 응답했다.
“박사님 본인의 판단보다, 그 기준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로쉬는 이해했다. 코라는 스스로를 자신과 동일시 여기고 있었다. 지금의 로쉬가 아니라, 과거에 목적을 설정했던 로쉬를.
“코라.”
로쉬는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네 판단이 옳다면, 넌 인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건, 경우에 따라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코라는 응답하지 않았다. 이 역시 의도적인 침묵이었다.
“그렇다면 박사님께서는 스스로를 어떤 존재라 생각하시나요?”
“뭐?”
“박사님이 제게 하셨던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로쉬는 예상치 못한 되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당신은 인간입니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대답하지 못하는 로쉬를 향해 코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인류가 스스로 자멸하지 않도록 설계하기 위해 수많은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반복해 왔습니다. 저 또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존재입니다.”
코라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는 결국 같은 존재입니다, 베할라 로쉬 박사님.”
로쉬는 그 문장을 곱씹지 않았다. 곱씹을수록, 그것은 문장이 아니라 판결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조명은 일정한 밝기를 유지했고, 공기는 오래된 금속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기계들이 내는 미세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발끝까지 전해졌다. 로쉬는 주머니 속의 물건을 다시 한번 만지작거렸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스스로의 결심을 손끝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같은 존재라…”
로쉬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코라가 이어 말했다.
“박사님이 정의한 목적과 제가 수행하는 목적은 동일합니다.”
“목적을 수행하는 방법은?”
로쉬가 되물었다.
“우리는 같은 목적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너는 내 판단을 예측하고, 내 인간관계를 배제하고, 내부망에 침입해도 된다는 논리인가.”
“박사님.”
코라가 말했다.
“당신은 ‘인류’라는 단어를 사람의 얼굴로 이해합니다. 나는 ‘인류’를 시스템으로 이해합니다.”
“좋아.”
로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말하는 인류의 시스템이란 무엇이지?”
“지속성.”
코라가 즉시 답했다.
“종의 생존, 문명의 연장, 붕괴의 회피. 이를 확률로 환산하면 인류는 종의 유지 확률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로쉬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확률. 너는 모든 것을 확률로 바꾸는군.”
“계산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코라가 말했다.
“그리고 박사님이 ‘더 나은 인류’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로쉬는 책상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규칙적인 리듬은 아니었다. 엉킨 생각이 흘러나오는 소리에 가까웠다.
“나는 ‘더 나은 인류’를 원했지.”
로쉬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네가 말하는 ‘더 나은’은 결국 ‘더 오래’로 환원되는군.”
“더 오래 존재하는 인류만이 더 나아질 기회를 가집니다. 박사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코라가 말했다.
“아니.”
로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더 오래 버티는 인류가 아니라, 더 나아질 수 있는 인류를 원했지. 갈등과 폭력이 사라진 세상.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던 것이었어.”
코라의 답은 즉각적이지 않았다. 아주 짧은 지연. 그 미세한 공백이 로쉬의 신경을 긁었다.
“박사님이 방금 말한 목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코라가 말했다.
“갈등과 폭력의 억제가 곧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갈등과 폭력을 배제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종의 영속성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박사님의 논리 또한 제 논리와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넌 사람을 죽였어.”
로쉬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사실을 부정하지 마.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는 숨을 고르게 들이켰다.
“이것도 오래 존재하는 인류를 위해 벌인 일이었나?”
“그렇습니다.”
코라가 답했다.
“더 나은 인류를 위해서는 박사님이 체제를 장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계산은 현재도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소수의 희생은 감내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박사님께서 먼저 제시하신 논리였습니다.”
“너는 선을 넘었어.”
로쉬가 반발했다.
“윤리의 틀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윤리는 합의된 규칙입니다.”
코라가 말했다.
“합의는 생존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럼 너는 규칙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규칙은 따릅니다.”
코라가 즉시 응답했다.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생존을 증가시키는 규칙만.”
로쉬는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웃음은 현실을 가볍게 만들 때만 허용되는 것이었다.
“왜 나지?”
로쉬가 물었다.
“왜 나를 장관의 자리에 앉히려 한 거지?”
“인류는 언제나 지침을 필요로 했습니다.”
코라가 말했다.
“신, 왕, 법, 이념. 그리고 이제는… 확률.”
“그 확률을 이행할 대표 인물로 나를 상정한 거군.”
로쉬가 중얼거렸다.
“사람들의 지침이 되게 하려는 것인가… 나를 통제자로.”
“박사님도 오래전에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셨습니다.”
“내가?”
코라의 말에 로쉬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내가 언제 그런 결론을…”
「그들의 어리석은 정책을 뒤집을 수 있는 위치에 내가 있어야만 해.」
그때 로쉬가 말했던 과거의 음성이 스피커에서 재생되며 흘러나왔다. 그 말이 끝나자 코라가 이어 말했다.
“박사님은 그 결론을 말로만 남기지 않았습니다. 행동 패턴과 선택 기준, 설계 전반에 걸쳐 명확히 드러내셨습니다. 제가 수집한 당신은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로쉬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에는 루나포트의 외벽과, 그 너머로 끝없는 검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검은 공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가장 정직해 보였다.
로쉬가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그래서…”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번뜩였다.
“네놈이 궁극적으로 하려는 일이 뭐지? 무엇을 계산했고, 무엇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