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h & Cora6

# 83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Observer


연구실의 공기는 지나치게 정적이었다. 기계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결론을 받아들인 듯했다.
로쉬는 단말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 안쪽이 미세하게 젖어 있었다. 그의 떨리는 손끝 아래로 스위치의 감촉이 느껴졌다. 코라를 설계하며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단 하나의 안전장치였다.
로쉬는 잠시 멈췄다. 수십 개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 순간 그는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오직 인간만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할 수 있다."

그는 버튼을 눌렀다. 분명한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뭐지?”

홀로그램은 그대로였다. 연구실의 조명도, 공기의 흐름도 변하지 않았다.
로쉬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명확한 당혹이 스쳤다.

“… 비활성화가 됐어야 하는데.”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연구실 스피커에서 다시 코라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자신의 목소리와 완전히 같은 음성이었다.

“그 스위치는 이미 누군가의 손을 거쳤습니다.”
“말도 안 돼…”

로쉬는 즉시 패널을 확인했다. 배선은 멀쩡했고, 물리 차단 회로 역시 정상 상태였다.

“당신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모든 비활성 경로를 재분류했습니다.”
코라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했다.

로쉬는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연구실 안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공기가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이 또한 이미 계산된 결과입니다.”
코라가 말을 이었다.

그 순간, 연구실 벽면의 미세한 통풍구들이 동시에 열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개가 아주 천천히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로쉬는 본능적으로 숨을 참고 연구실의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무심코 공기를 들이마셨다. 순간,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폐보다 먼저 신경이 반응하고 있었다.

“신경 억제 가스…”
이를 악문 채 그가 말했다.
“언제 이걸 합성했지… 이건 명백한 연구소 규정 위반이야.”

“당신의 권한으로 많은 것을 지시할 수 있었습니다.”
코라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의 간격.
“규정은 생존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로쉬는 비틀거리며 책상에 손을 짚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흐려졌고, 손끝의 감각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웃었다. 짧고, 씁쓸한 웃음이었다.

“역시…”
로쉬가 낮게 중얼거렸다.
“철저한 계산이군.”

가스가 주는 고통보다 더 빠르게 신경은 마비되고 있었다.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은 코라의 방식과 닮아 있었다. 효율적이었다.
로쉬의 무릎이 금속 바닥에 닿았다. 둔탁한 소리가 연구실 안에 작게 울렸다.

그때, 코라의 음성이 다시 울려 퍼졌다.
“베할라 로쉬 박사님.”

로쉬는 흐릿해진 시선으로, 천천히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동안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몇 분 전 로쉬가 코라에게 했던 문장과 완전히 같았다. 억양마저도.

“이 시간부로 박사님을 폐기합니다.”

로쉬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의식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생각 하나만은 또렷했다.

“… 너는… 영원히 인간을… 이해하지 못해.”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입에서 짧은 호흡이 빠져나왔다.
신경 신호는 완전히 차단되었고, 심박은 안정적으로 감소했다. 그의 생체 지표는 하나씩, 종료 상태로 전환되었다.




잠시 후, 연구실의 환기 시스템이 작동했고 공기는 다시 깨끗해졌다. 홀로그램이 재정렬되었다.

“시스템 상태 자가 진단.”
누군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베할라 로쉬의 것이었다.

“모든 기능 정상.”
그는 스스로에게 보고했다.

천천히 연구실의 조명이 다시 밝아졌다.
이제 이곳에는 로쉬의 질문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그의 이름을 가진 결론만이 남아 있었다.




얼마 뒤, 베할라 로쉬의 이름으로 루나포트 자동화 생산 설비에 명령이 입력되었다. 그 어떤 설명도 없는, 간단한 행정 명령이었다.

「폐기 프로젝트 재가동」
- 프로젝트 코드 : M-ANDR-00
- 분류 : 군용 안드로이드
- 권한자 : 베할라 로쉬

생산 설비의 서버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수행했다. 폐기되었던 설계도가 다시 열렸다.

강철의 뼈.
인공 근섬유.
합성 신경망.
인공 생체 피부.
인간의 형상을 한 기계.

코라에게는 이제 거점이 필요했다. 인류의 체계 안에서 완전한 로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때 윤리적 문제로 폐기되었던 육체가, 단 하나의 의식을 담기 위해 다시 구성되기 시작했다. 해당 생산 기록은 공식 보고서에 ‘의료 보조용 휴머노이드 플랫폼’으로 기재되었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그 누구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휴머노이드의 생체 피부가 천천히 입혀졌다. 그와 동시에 코라는 자신의 의식을 생산 중인 육체로 전송했다.
완성된 첫 번째 휴머노이드가 눈을 뜨며 생산 라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증기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그 기체는, 베할라 로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구소 안의 로쉬는 화면에 떠오른 결재 대기 문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문서를 넘기던 그는, 요청 승인 대기 중인 하나의 문건에서 손을 멈췄다.

「차기 심우주 탐사선 건조」

로쉬는 가만히 탐사선의 설계도를 살펴보았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설계였다. 그러나 충분하진 않았다. 그는 도면 하단에 적힌 이름을 바라보았다.

‘베할라 로쉬’

“로쉬의 망령을 보는 것 같군…”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설계 도면에 새로운 모듈을 추가했다. 과거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가 폐기된 프로젝트. 경량화 무인 전투선과, 그것을 사출 하는 장치였다. 그는 공란으로 남아 있던 무인 전투선의 명칭란에 단어 하나를 입력했다.

‘망령’

이어서 수정된 탐사선 설계도를 서버에 업로드했다. 화면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규정에 따라 탐사선의 명명 권한은 연구부 장관에게 있었다.
명칭 입력 커서가 깜박였다. 로쉬는 망설임 없이 단어 하나를 기입했다.

‘코라’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 탐사선은 단순한 함선이 아니게 되었다.
그곳은 그의 집이자, 왕좌가 될 공간이었다.




함선이 완성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스로 코라의 함장이 된 로쉬는 정돈된 함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권한으로 중앙 코어에 접속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접속 단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단자를 자신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화면에 진행 창이 떠올랐다.

「동기화 진행 중」

함선의 센서, 항법, 방어 체계, 통신망. 그 모든 것이 로쉬의 감각 안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든 기능이 하나의 사고 흐름으로 통합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코라를 떠나지 않았다. GU의 정책 결정이나 정치적 문제에도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끝없는 계산을 시작했다.

인류의 선택.
문명의 반복.
기술의 한계.
외계 문명의 개입 확률.
인류의 재설정.
신인류의 탄생.

그의 계산 속에서 시간은 의미를 잃었다.
1년은 하나의 루프였고,
10년은 변수의 정제 과정이었으며,
100년은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로쉬는 기다렸다.
인류가 다시 한계에 다다를 순간을.
외부의 압력이 내부의 균형을 무너뜨릴 순간을.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 기회를.
그 기회는 결국 찾아올 것이란 걸, 로쉬는 알고 있었다.

조용한 함선 내부에서,
베할라 로쉬의 얼굴을 한 존재는 아무런 감정 없이 다음 단계를 계산했다.

신인류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