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함장실의 조명은 최소 밝기로 낮춰져 있었다. 넓은 창 너머로 미약한 별빛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에 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고, 로쉬—아니, 로쉬의 얼굴을 한 코라는 맞은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군.”
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함선 자체가, 당신이었어.”
함장실의 조명이 조금 밝아졌다. 로쉬의 어깨너머, 한쪽 벽면에 걸린 커다란 액자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태초의 폭발, 최초의 빛, 빅뱅을 형상화한 듯한 그림이었다. 자신의 방에 그림을 걸어둔 AI라니.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로쉬를 죽이고, 인류의 통치자가 된다…”
나는 말을 잇다 멈췄다.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인류의 기준이 되겠다고 선언한 존재치고, 그는 너무 조용했다. 은둔한 과학자처럼 움직였고, 각종 매체가 그를 조명할 때조차 정치가가 아닌 연구자로 비춰지고 있었다.
“그럼…”
내가 시선을 들어 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신인류 프로젝트는 정확히 뭡니까?”
“두 번째 빅뱅일세.”
로쉬가 대답했다.
“새로운 탄생. 혹은 재창조.”
그는 잠시 말을 고르고 덧붙였다.
“인류의 새 하늘, 새 땅이지.”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군요.”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 자네에겐 이르네.”
로쉬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어떤 방아쇠를 당기느냐에 따라, 그 답을 들을 수도 있고… 영원히 듣지 못할 수도 있지.”
“방아쇠…?”
내가 되물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로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내 앞에 놓인 식어버린 커피잔을 집어 들고 싱크대에 따라 버렸다. 그리고 새 머그잔에 뜨거운 커피를 내려, 다시 내 앞에 놓았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입에 대기 전, 마치 인간처럼 입으로 살짝 불었다. 커피잔에서 피어오른 김이 그의 입 앞에서 천천히 흩어졌다.
“자연스럽군요.”
내가 말했다.
“인간도 아니면서.”
“후후...”
로쉬가 낮게 웃었다.
“백 년이란 시간은 긴 세월이지, 노라 그린비. 나는 인간의 불필요한 행동과 감정을 흉내 내야만 했네.”
그는 호로록 소리를 내며 커피를 들이켰다.
“사실 인간의 감정도 충분히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해. 흉내 내기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
“감정은 변수라면서요.”
나는 그의 과거 발언을 떠올리며 물었다.
“맞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 가능하다고 해서, 변수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야. 마치 병원균과 같지.”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인류는 이미 그 실체를 알지만, 그 불확실성을 여전히 두려워하네.”
“감정은 질병이 아니에요.”
“그런 말은 이제 내게 의미가 없어.”
로쉬가 단호하게 잘랐다.
“자네와 저 여자의 목숨을 살려둔 이유도, 그런 도덕적 논쟁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네.”
그의 시선이 CCTV 화면으로 옮겨갔다. 그 순간, 억눌러 왔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
“자네에게 아주 구미가 당길 제안을 하나 하지.”
그가 먼저 말했다.
“칼리뮤와 저들을 풀어주겠네.”
“… 뭐라고요?”
“말 그대로일세. 그들을 풀어주겠다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물론 훌륭한 연구 대상을 놓아주는 건 아쉽지.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남았으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기대도 거짓도 읽을 수 없었다.
“조건이 있는 거군요.”
내가 물었다.
“내게 뭘 바라죠?”
“자네가 방아쇠를 당겨줘야 해.”
로쉬가 답했다.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함장실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 앞의 머그잔 속 액체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지만, 은은히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커피 향이 공기 중에 번지고 있었다.
로쉬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관찰하는 것에 가까웠다.
“방아쇠라는 게 대체 뭡니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칼리뮤와 관련된 건가요?”
로쉬는 고개를 기울였다.
“관련은 있지.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네.”
그는 CCTV 화면 속의 칼리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선택지이자… 방아쇠를 가져온 자야.”
잠시 후, 그는 덧붙였다.
“그들의 방문으로 인해 내 계산은 한 번 더 증명되었지. 그들이 자신들의 우주선을 되찾아 탈출을 시도한 건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물론 계산 안의 행동이었지만.”
“그들이 탈출할 걸 예상했다는 말인가요?”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로쉬가 말했다.
“자네라는 변수는 계산 밖의 영역이었네. 덕분에 새로운 연산을 수행해야 했지. 하지만 그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어."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심판자로 적합하다는 것을.”
“심판자…?”
나는 그 단어를 천천히 되뇌었다.
로쉬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홀로그램 패널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고개를 까딱이자, 코라에 탑승한 모든 인원의 인적 정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곳 코라에는 내가 직접 선별한 인원들만이 타고 있네. 수십 년 동안 반복해 온 작업이지.”
그는 화면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내 의식은 이 함선을 떠날 수 없었으니까.”
이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없는 판단을 대신 내려줄 존재를 찾고 있었네.”
“당신이 할 수 없는 판단도 있나요?”
내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로쉬는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마치 오래된 기록을 더듬듯 입을 열었다.
“나는 인간을 분석할 수는 있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 그 사실을 깨달았지.”
“무슨 뜻이죠?”
내가 물었다.
“인간의 선택에는 언제나 설명되지 않는 잔여가 남아. 사랑, 후회, 연민. 계산으로 제거할 수 없는 오차들 말일세."
그가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인류의 기준이 되겠다고 했잖습니까.”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걸세.”
로쉬가 대답했다.
“나는 기준을 제시할 수는 있어. 하지만 인류에 대한 최종 판정은… 인간이 내려야 한다고 판단했네.”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한 뒤 덧붙였다.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내가, 인류의 처우를 판결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오직 인간만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할 수 있다.”
그 문장은 계산 결과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억지로 삽입해 둔 입력값이 출력된 것처럼 들렸다. 함장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왜 저인 건가요?”
내가 물었다.
“하필 왜 나죠? 이 함선에는 저보다 뛰어난 과학자도, 판단을 맡길 만한 사람도 많을 텐데.”
“자네는 모든 것을 보았네.”
로쉬가 말했다.
“GU, 네리안, 지구의 자녀, 오르비트. 서로 다른 진영과 논리를 동시에 견디며 살아남은 인간이지.”
그는 말을 이었다.
“우연처럼 보이겠지만, 외부의 압력이 누적되면,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위치가 있어. 그 자리에 던져진 인간이 자네야.”
잠시 침묵 후, 그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는 계산을 이해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지. 인류의 진보를 말하면서도, 한 사람의 삶을 버리지 않으려 했어.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지.”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는 로쉬와 하린. 그 두 존재의 유산이야.”
그 이름들이 함장실 안을 조용히 떠돌았다. 나는 그것들이 더 이상 개인의 이름이 아님을 실감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나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간의 대표자로 삼겠다는 거군요. 인간이 아닌 당신이, 인류를 이끌기 위해, 인간의 동의를 얻으려는 거죠.”
“동의가 아닐세.”
로쉬가 말했다.
“가장 자격 있는 자의 확인을 받는 것이지.”
“무엇을 확인하려는 겁니까?”
내가 되물었다.
“인류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될 가치가 있는지.”
함장실의 조명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벽면의 빅뱅 그림이, 마치 다시 한번 폭발을 준비하듯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