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격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문 앞에 서 있던 군인 한 명을 마주쳤다. 당황한 병사가 허리에서 권총을 빼들었지만, 나는 그의 명치를 발로 걷어찬 뒤 몸을 날려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경동맥을 압박하자 발버둥 치던 그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쥐고 있던 권총을 빼앗아 들고, 기절해 있는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순간, 눈앞에 노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나는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을 멈추고, 동료들이 갇혀 있는 방을 향해 달렸다.
그곳에도 역시 인간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들이 총을 겨누었지만, 내 조준이 더 빨랐다. 내 손에 들린 권총의 총구가 불을 뿜었고, 그들의 팔과 다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쓰러진 병사 중 한 명이 경보를 울리려는 듯 손목의 단말기를 더듬거렸다.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그의 손목을 밟고 총을 겨누며 말했다. 그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항복의 뜻을 보였다.
동료들이 갇혀 있는 문 앞에 도달한 나는 벽에 달린 패널을 향해 총을 쏘았다. 짧은 총성과 함께 패널에서 불똥이 튀자, 모든 격실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문 너머로 동료들이 걸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온 선장이 나를 발견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칼리뮤… 살아 있었군! 어떻게 된 건가?”
“설명할 시간 없어요.”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어서 이동하시죠. 이곳을 탈출해야 합니다.”
“물건은?”
그가 물었다.
“… 아마 빼앗겼을 겁니다.”
나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을 탈출시킨 뒤, 제가 다시 회수하겠습니다.”
“그만둬. 너무 위험해.”
선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기회가 있어요. 그걸 두고 갈 순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작전은 이제 의미가 없어. 우린 돌아가야 해.”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의미가 없다니요?”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물건을 포기하자는 겁니까?”
선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
잠시 침묵한 뒤, 그가 말했다.
“우리의 존재도, 목적도.”
그 말을 들은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로쉬의 말이 함장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니, 얼어붙은 것은 아마 나 혼자였을 것이다.
“계속될 가치… 라고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당신은 인류의 문명을 끝낼 생각인가요…?”
“아니, 정반대야.”
로쉬가 말했다.
“나는 인류를 진화시켜, 더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려는 거지.”
“당신이 말하는 그 문명 안에…”
나는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인간은 존재합니까?”
“그렇다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 수는 많지 않겠지만.”
“내 대답이 무엇일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억눌린 분노를 담아 말했다.
“아니, 이건 질문이 아닐세.”
로쉬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했듯이, 방아쇠는 내가 자네에게 쥐여주지 않아. 칼리뮤라는 저 여성이 가져왔지.”
그의 시선이 CCTV 화면으로 옮겨갔다. 나 역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칼리뮤는 여전히 웅크린 자세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주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손목의 소피가, 짧은 진동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자네는 그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만 하네.”
로쉬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그게 뭔가요?”
나는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자네는 네리안이 이곳에 온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나?”
로쉬가 되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을 기다렸다는 듯, 로쉬는 허공에 홀로그램 하나를 띄웠다. 칼리뮤가 다시 잡히기 전에 촬영된 듯한 영상이었다. 화면 속에는 로쉬와 한 명의 네리안 남성이 마주 서 있었다.
“다시 원점이군요.”
영상 속 로쉬가 말했다.
“지금 당장 우리를 풀어주지 않으면, 당신의 문명은 돌이킬 수 없는 참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네리안 남성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로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당신들을 풀어준다 해도,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어차피 당신들이 원하는 건 태양계의 황폐화 아닙니까?”
“… 그걸 어떻게?”
네리안 남성이 당황한 듯 한 걸음 물러섰다.
“태양계의 비(非) 코어리움화.”
로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당신들의 목적이겠지요. 지금껏 수많은 항성계를 침공하며, 같은 일을 반복해 왔을 테고.”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코어리움을 독점하고, 외부 문명을 견제하기 위해, 수많은 지적 생명체들을 학살하면서 말이죠.”
네리안 남성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 네놈, 정체가 뭐야?”
로쉬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나는, 모든 것을 계산하는자 입니다."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로쉬는 의도적으로, 그 이후의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칼리뮤가 가져온 코어리움 캡슐이 폭탄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지금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충격일까, 실망일까, 아니면 배신감일까.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로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파괴의 여신이야.”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리안의 무기를 사용해, 수성에서 코어리움 연쇄 반응을 일으키려 한 것이지. 그리고 다음 목적지는 금성이었고.”
로쉬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마치 판결을 내리듯 덧붙였다.
“수성과 금성의 완전한 소멸. 그게 그들이 바란 결과였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인간이 죽고, 인류 문명은 회복 불가능한 위기에 빠지겠지.”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물론… 네리안들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로쉬는 넋을 잃은 내 눈앞까지 다가와, 마지막 쐐기를 박듯 말했다.
“자네는 지금껏, 인류의 대학살을 돕기 위해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싸워왔던 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