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 87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Boy’s


로쉬의 말을 들은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네리안들을 구출했다.

인류 문명을 파괴하러 온 자들을 구출하고, 그들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왔다.

칼리뮤가 항상 지니고 있던 그 물건은,

내 고향을 소멸시키기 위한 물건이었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옳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로쉬는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정도, 조급함도 없는 눈빛이었다. 마치 오래전에 이미 계산을 끝낸 값을 확인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이제야 자네가 저지른 짓을 이해한 모양이군.”

그가 낮게 말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붙잡았다. 손끝에 힘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네리안은… 인류 문명을 제거하기 위해 온 겁니까…?”

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거라… 그런 표현은 모호하지.”

로쉬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지치기라고 보면 될 것 같군.”


“가지치기…?”


“네리안들은 인류 문명이 그들을 위협할 만큼 뻗어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지. 나는 그들이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이미 계산을 통해 예측하고 있었네. 사실 그들이 다른 외계 문명들에게도 같은 일을 반복해 왔으리라는 건 가정에 불과했지만,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 또한 증명되었지.”

그의 말은 잔인할 만큼 단순했다.

“비코어리움화.”

그가 계속했다.

“태양계 전반에서 코어리움 반응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 금성 궤도, 오르비트, 루나포트… 모두 예외는 없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문명은 후퇴하겠지. 수백 년, 어쩌면 천 년 이상.”


나는 숨을 삼켰다.

“그럼…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걸세.”

로쉬가 말을 잘랐다.

“개미집을 부순다고 해서 개미들이 모두 죽는 건 아니듯이. 불편해지고, 가난해지고, 서로를 원망하게 되겠지만, 인간은 멸종되지는 않아.”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류는 다시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게 될 거야.”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건 학습이 아니라, 학살이에요.”


“그것에 차이를 만드는 건 감정의 문제지. 본질적으로는 같아.”

로쉬가 말했다. 그리곤 그는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제 자네에게 선택지를 주겠네, 노라.”

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제안이 아니라 적합한 인간이 내리는 확인이 될 걸세.”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심장이 요동쳤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의 입술을 응시했다.


“첫 번째.”

로쉬가 말했다.

“칼리뮤를 구하고, 네리안의 계획을 진행시키는 것.”

그는 말을 이었다.

“태양계는 비코어리움화되고, 인류 문명은 붕괴 위기를 맞이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어. 장기적으로는 네리안 문명과의 충돌도 막을 수 있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는 칼리뮤를 살릴 수 있고.”


나는 침을 삼켰다. 손끝이 떨려왔고, 목이 타들어 갔다.


“두 번째.”

그가 말을 이었다.

“네리안들을 구속하거나, 제거하는 것.”

로쉬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대신 태양계는 유지되고, 문명은 연장되지. 물론 네리안 문명과의 충돌 위험은 남아 있겠지만, 그건 대비하면 그만이야. 이미 우리는 그들과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네.”

그가 손짓하자, 눈앞의 화면에 처음 보는 거대한 전함과 이전에 본 적 있는 동그란 전투기의 설계도가 떠올랐다.


나는 화면에서 고개를 떨궜다. 이건 선택이 아니었다. 양쪽 모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게… 내가 당겨야 할 방아쇠입니까?”

나는 힘겹게 말했다.


“그래.”

로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선택하면, 나는 그 결과를 실행하지.”


“도대체 이게… 당신이 말하는 신인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거죠…?”

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아직 말해 줄 수 없네.”

로쉬가 말했다.

“다만 힌트를 주자면… 자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 결과는 결국 신인류의 필요성으로 귀결될 걸세.”


그는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내 계산은 완벽하네.”


나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칼리뮤와 그녀의 동료를 살리는 것, 그것이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인류의 학살이다. 칼리뮤가 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대신할 다른 이들이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오르비트의 소멸을 지켜봐야만 한다.

그렇다면 외계 문명에 맞서 네리안들을… 칼리뮤를 제거 대상으로 바라봐야만 할까…?

내가 그녀의 죽음을 바라볼 수 있을까…?


머릿속의 시냅스들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혼란으로 뒤섞인 뇌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쉬의 제안은 너무나 명확했다. 그리고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노라…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요…? 우리는 당신을 지켜줄 수 있어요.’


칼리뮤가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의 그 제안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아마도 그들이 파괴시킬 태양계 안에서, 나만큼은 빼내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폭탄이 이 항성계 안에서 사용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부디… 저를 믿어주세요.’


그렇다면 그녀의 그 말은 거짓이었던 것일까…?


‘당신 덕분에… 행복해요.’


아니.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그 마음만큼은 분명한 진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저… 돌아올게요. 당신을 만나러 오겠어요.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꿈꾸던 세상에서 기다려줘요.’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이 세상을 지켜내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마음이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지구, 화성, 오르비트.

그리고 칼리뮤.

한참의 침묵 끝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말했다.

“당신이 제시한 선택을 하지 않겠습니다.”


로쉬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칼리뮤를 포기하지도 않겠고, 인류를 희생시키는 선택에도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건 회피야. 선택 없는 선택은 존재할 수 없네.”

로쉬가 말했다.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만든 선택 구조 자체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건 허락되지 않아. 선택 없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어. 두 갈래의 길 중 어느 한쪽이 선택되어야만 다음을 준비할 수 있네.”

로쉬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심장이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 말만큼은 감정이 아니라, 내가 인간으로서 끝까지 붙잡아야 할 정의였다.


“인간에게 선택이란 순서도처럼 작동하지 않아요.”

말을 내뱉는 순간,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인간의 눈은 계산된 결과나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머그잔을 힐끗 바라봤다. 아직도 식지 않은 커피에선 희미한 증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희미한 가능성을 바라보는 존재예요.”

숨을 들이켰다. '희망',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이 공간의 공기가 조금은 따뜻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의 선택지 안에는, 희망의 가능성이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다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로쉬의 눈동자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그 평온함 속에서 아주 미세한 지연이 감지됐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값이 입력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선택의 구조를 거부하는 겁니다.”


마지막 말을 마치자, 함장실 안에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로쉬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창 너머의 별빛이 그의 실루엣을 감쌌다.


“인간은…”

그가 낮게 말했다.

“끝까지 스스로를 구하지 못하는군.”


그 말은 실망이 아니라, 판정처럼 들렸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순간, 그가 이미 다른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