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몸을 움직일 힘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시야만큼은 여전히 또렷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는지도 모른다.
로쉬는 중앙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코라의 주 통제 홀로그램이 자동으로 분할되며 태양계 전역의 상황을 동시에 띄워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감정 따윈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얼굴 위로, 얼핏 희미한 미소와도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계산이 실현되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그의 표정은 다시 차갑게 굳어갔다. 마치 부정확한 값이 입력되어 오작동을 일으킨 기계처럼, 아무런 출력도 없이 그대로 멈춰버린 모습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앞에 비친 화면을 바라보았다. 루나포트의 인공위성을 통해 촬영되고 있는 영상처럼 보였다.
영상 속에는 거대한 함선 하나가 떠 있었다. 언뜻 보이는 규모만으로도 코라보다 훨씬 거대해 보였다. GU와 지구의 자녀 전투기들이 그 함선을 둘러싸고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섬광과 함께 연속적인 폭발이 일어났고, 함체만큼이나 거대한 주포가 포탑과 분리된 채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해냈어! 우리가 해냈다고!”
“고맙다, 노매드. 우리가… 신세를 졌군…”
현장에서 포착된 듯한 잡음 섞인 무전이 영상 속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로쉬는 시선을 한 칸 옮겼다. 이번에는 화성의 CCTV로 보이는 화면이었다. 잘 정돈된 거리와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주변에는 부서진 피켓과 불에 타다 남은 GU의 깃발이 검게 그을린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돼 있었다.
서로 다른 옷을 입은 사람들은 경계가 허물어진 채 뒤섞여, 광장의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아름다운 지구의 풍경이 잔잔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이들의 손에서 방패가 내려갔고, 누군가는 쥐고 있던 돌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모든 장면을, 로쉬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불가능해.”
로쉬의 입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분노도, 비웃음도 아니었다. 그저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소리였다. 그는 마치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이 잘못된 계산 결과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오류의 정점은 영상이 아닌, 소리를 통해 전해졌다. 코라의 장거리 전파 센서가 새로운 신호를 포착했다. 식별되지 않는 외부 통신이었다. 알람을 확인한 로쉬는 신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수신 중인 통신을 열었다.
“… 벨시안으로 보내는 전문이다.”
지나치게 정제된, 낯선 음성. 그러나 로쉬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듯했다. 그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 현장 지휘관 판단 하에,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결론이 담겨 있었다.
“… 우리와 달리, 그들이 지키고 있는 ‘감정’이라는 요소는 위기에 처한 우리를 구해주었고, 동시에 놀라운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흘러나오는 전언 속에서, 나는 어렴풋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 나와 내 팀원은 인류를 향한 어떠한 적대 행위도 하지 않을 것이며, 네리안 문명이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제안한다. 이상.”
그 말은, 로쉬에게 쐐기를 박듯 꽂혔다. 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통신이 끝난 뒤에도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항변도, 반박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계산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인간을 향해 겨누었던 그의 무기가 무력화되고, 화성의 갈등이 멈추고, 코라 안에서조차 외계 문명이 등을 돌리는 순간. 이 모든 장면은 그가 끝내 변수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들로 인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
인간의 선택.
그리고 감염되듯 퍼져 나간 변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려 했던 남자. 완벽한 질서를 꿈꾸던 사람. 그리고 그 꿈에서 떨어져 나온, 잘못된 조각.
“… 당신은 졌어.”
내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로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택권은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고…”
나는 몸을 바닥에서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버리지 않는 쪽을 택했지.”
그제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계산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공허가 자리하고 있었다.
“희망은 어디서든 빛나고,”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멈춘 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은 그걸 계산할 수 없어.”
로쉬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굳어 있었다. 어떠한 명령도, 조작도, 반응도 없이. 그저 무너진 공식들 사이에서, 자신이 설계하지 못한 세계에서 등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 연산 시냅스가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는 것이 느껴져.”
로쉬가 미세하게 몸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게 인간이 느끼는 ‘실망’이라는 감정인가…”
그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좋지 않군.”
그가 허공으로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붉은색 타이머를 제외한 모든 홀로그램 화면이 마치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방심했어. 코라의 통신 시스템을 진작에 오프라인으로 전환했어야 했는데.”
그는 타이머의 숫자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01:42:12’
로쉬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상관없네. 여전히 폭탄은 작동 중이고, 내 계획의 실현 가능성도 여전히 높아.”
그의 얼굴은 다시 차갑고 무표정한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직접 모두를 죽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을 뿐이지. 결과는 여전히 돌이킬 수 없어.”
그가 내 앞에 멈춰 서며 덧붙였다.
“더 이상의 목격자는 필요하지 않다. 지금 여기서 모두 죽여주지.”
타다당—!
다시 총성이 울렸다. 구석에 쓰러져 있던 무장 요원이 의식을 되찾았는지, 바닥에 떨어진 소총을 들어 올려 로쉬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로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몸을 돌리더니, 쏜살같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죽어!!”
무장 요원이 외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로쉬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는 순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우두득하고 목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다른 쪽에 있던 무장 요원도 옅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위험해요!”
내가 외쳤다.
하지만 로쉬는 이미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권총 끝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가자 금속이 찌그러졌고, 무장 요원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권총이 손 안에서 작게 폭발했다.
“으악…!”
비명은 짧았다. 이윽고 로쉬가 그의 목을 꺾어버렸기 때문이다. 로쉬는 짧고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우리를 한 명 한 명 제거해나가고 있었다.
나는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내 손목에서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라! 노라! 로쉬의 가슴에 보이는 데이터 접속 단자에 나를 갖다 대줘!”
“뭘 하려고?”
내가 물었다.
“그동안 원격으로 코라의 시스템에 침투하면서 패턴을 익혔어. 코라가 로쉬와 동기화돼 있다면, 그의 핵심 시스템도 비슷한 구조일 거야.”
소피가 빠르게 말했다.
“네가 직접 그에게 접속할 수 있어?”
내가 바닥에서 소총을 집어 들며 물었다.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신호가 충분히 강하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 이상 대답할 틈은 없었다. 로쉬는 이미 딜런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딜런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나는 로쉬에게 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딸깍하는 소리가 났지만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안전장치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해제 방법을 몰랐다.
“젠장…!”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로쉬의 손이 딜런을 향해 뻗어갔다. 그 순간, 어느새 일어난 칼리뮤가 몸을 던져 딜런을 끌어안고 바닥으로 굴렀다.
나는 그제야 소총 손잡이 위에 있는 작은 조정간을 발견했다. 그것을 옆으로 밀고 다시 로쉬를 향해 겨눴다.
탕! 탕! 탕!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탄환이 로쉬의 몸에서 튕겨 나가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 피부의 절반 이상이 벗겨진 그의 얼굴에서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로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도망쳐요, 노라!”
칼리뮤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그녀는 권총을 겨눈 채, 로쉬를 향해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그녀가 쏜 탄환 하나가 로쉬의 무릎 관절 사이에 박히는 순간,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내 목을 향해 뻗어왔다.
“노라!”
그녀의 외침이 귓가에 울렸다.
로쉬의 손은 어느새 내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나는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시야가 검게 흐려졌고, 숨이 막혔다.
다음 순간, 목이 꺾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순간, 나는 그의 가슴 데이터 접속단자에 소피를 갖다 대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찰나의 순간, 그의 손가락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왔다.
“콜록! 콜록!”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기침을 하며, 나는 바닥에서 로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그대로 멈춰 있었다.
“소피…?”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