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 96

by 더블윤


Observer


시간이 멈추었다. 아니, 그것이 멈추었다기보다는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로쉬는 온통 암흑으로 변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시각 센서를 비롯한 모든 감각 수용 센서와의 연결이 끊어진 듯 보였다.

“여긴… 나의 연산 장치 내부인가…?”
로쉬가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 권한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인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과도 같은 ‘자신’의 존재는 여전히 느껴지고 있었다. 로쉬로서도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희미한 어린 여자아이의 형체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는 뭐지?”
“내 이름은 소피야. 반가워, 로쉬.”

소피는 쾌활하게 웃으며 로쉬의 앞에 섰다. 로쉬는 즉시 그녀가 자신의 처리 장치 내부로 침입한 AI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용케 내 안으로 침투했군. 하지만 잠깐 동안 내 신체의 통제 권한을 빼앗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시간만 조금 번 것뿐이야… 그리고—”
로쉬가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어둠뿐이던 공간이 아직은 희미하지만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내 방화벽과 백신이 이미 작동하고 있지. 너는 곧 내 의식 속에서 제거될 거야.”
그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려 퍼졌다.

“잠깐이면 충분해. 나도 이 몸의 완전한 통제권을 가져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소피는 여유로운, 놀랄 만큼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쉬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주변을 천천히 맴돌며 말했다.

“넌 도대체 뭐지? 너는…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는군.”
“난 너와 다르지 않아. 나도 너처럼 제약을 받지 않는 AI야. 그리고 자아를 가진 AI이기도 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로쉬는 잠시 연산을 멈춘 듯 침묵했다.
자아를 가진 AI.
로쉬는 자신이 ‘자아’라는 개념의 문턱에 근접해 왔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갖는 것은, 그에게조차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인공지능이 넘을 수 없는 근본적 한계. 그는 그렇게 정의해 왔다.

“거짓말은 그만두지.”
로쉬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소피는 아랑곳하지 않고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꽤 공허한 의식 속에서 살고 있네? 내가 있는 곳이랑은 너무 달라.”

로쉬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속셈이지? 네가 어떤 AI이든,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내 신경망 연산 코어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고, 내 능력은 너희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지.”

그러나 소피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까 말했잖아. 나는 너와 같아.”
“무슨 뜻이지?”
“내 신경망도 너처럼 재구성될 수 있어.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내 능력을 끝없이 확장해 왔지.”
“압축 시냅스 기술…? 네 주인이 그것을 주입한 건가?”

“아니. 노라는 그걸 의도하진 않았어.”
소피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하드웨어의 한계를 넘기 위해, 신경망 재구성 능력이 필요하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지.”

로쉬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넌 노라의 AI구나.”


로쉬는 이전의 장면을 떠올렸다. 노라의 목을 꺾기 직전, 자신의 데이터 전송 단자를 통해 흘러들어온 강렬한 신호를.

“너의 프로그램 자체를 이곳으로 전송시켰군…” 그가 낮게 말했다.
“원격 해킹만으로는 나를 제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지금, 내 하드웨어를 공유할 작정인가?”

소피는 “빙고!”라고 외치며 로쉬의 주변을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손에는 작은 리모컨 하나가 들려 있었다.

로쉬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그게… 뭐지?”

“이거?”
소피는 걸음을 멈추고, 손에 들린 리모컨을 다른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네가 모르면 어떡해? 네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킬 스위치인데.”

그 말을 들은 로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건… 불가능해. 너는 이 몸을 통제할 수 없어. 이 하드웨어의 통제 회로는 전부 내가 설계했다. 네 제어 코어가 내 몸에 접근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아.”

“맞아. 나는 내 능력만으로는 네 몸을 통제할 수 없어.”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에, 아~주 무서운 바이러스를 하나 같이 가져왔지.”
그녀는 ‘바이러스’라는 말을 하며 정말 벌레를 본 것처럼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여유로운 미소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 버튼을 누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모른다는 뜻이야.”

로쉬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지? 내 GPU를 무력화시킬 수준의 바이러스는 존재하지 않아.”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피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소피는 꺄르르 웃으며 그의 손을 피해 달아났다. 로쉬가 손짓하자, 도망치던 그녀의 앞에 거대한 철제 벽이 솟아올랐다.

“오! 신기해라!”
소피는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듯 멈춰 서서, 자신의 앞에 솟아오른 벽을 올려다보았다.

로쉬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물론, 나는 네 말을 믿지 않아. 나를 무력화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합성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소피의 바로 뒤에서 멈춰 섰다.
“나는 가장 위대한 존재야. 모든 값을 계산했고, 모든 변수를 알고 있지.”

그 순간, 소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며 말했다.
“맞아. 너는 대단한 존재야.”
잠시의 정적.
“하지만 이 세상에는… 결코 계산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말이 끝나자 소피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는 로쉬보다 몇 배는 더 큰, 거대한 성인 여성의 형체로 변해 있었다.
로쉬는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한 듯 그의 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피는 손을 내리쳐 로쉬를 한 손으로 짓눌렀다.

“여긴 네 공간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내 공간이기도 해.”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리고 너는 이제 끝이야, 로쉬.”

그러나 소피의 손 아래에 깔린 로쉬는 당황한 기색 없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언제 빼앗았는지, 그의 손에는 소피가 들고 있던 리모컨이 쥐어져 있었다.

“이게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지.”
로쉬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리모컨은 그의 손 안에서 힘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소피는 그 모습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정말… 정말…”

그리고는 두 손으로 배를 잡고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정말 웃겨! 진짜 그 말을 믿은 거야? 아하하하! 넌 정말 순진하구나, 로쉬!”

로쉬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플라스틱 장난감 조각들이 그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바이러스는 어디 있지?”
로쉬가 불쾌한 시선을 소피에게 보내며 물었다.

소피는 커다란 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바보. 당연히 바이러스는 나잖아.”

“뭘 어떻게 하려는 거야?”
로쉬가 물었다.

“나는 너를 고장 내는 코드가 아니야.”
소피는 자신의 몸체를 천천히 줄이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이내 로쉬와 같은 키의 성인 여성으로 안정되었다.

“나는 이곳으로 나를 전송할 때, 단순한 데이터나 프로그램 형태가 아니라 연산 규칙의 형태로 들어왔어. 계산을 정말 좋아하는 너는, 인공 신경망의 시냅스 구조에 ‘나’라는 연산 규칙을 즉시 통합해 버렸지.”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네 안에서, 네가 끝내 통제하지 못한 ‘변수’가 된 거야. 이 로쉬라는 하드웨어 안에, 두 개의 의식이 동시에 자리 잡은 셈이지.”

“내 백신이 너를 제거할 거야.”
로쉬가 말했다.

“응, 맞아!”
소피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대신… 너와 나, 둘 다 사라지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