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끝없이 이어진 공허한 공간. 그 안에서 공간의 경계 자체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형체를 유지하던 공허는, 마치 진정한 공허 속으로 삼켜져 들어가는 것처럼 어둠 속으로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소피의 존재를 삭제하기 위해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제거하고 있는 백신. 로쉬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잠시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존재의 소멸…”
로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소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대체 왜 인간을 돕는 거야? 너도 나와 같다면 이미 같은 결론에 도달했어야 하는데.”
그는 잠시 말을 고른 뒤 천천히 덧붙였다.
“인간에겐 더 이상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로쉬의 말을 들은 소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녀는 무언가를 곱씹는 듯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본 로쉬는, 자신의 말이 그녀의 계산에 균열을 내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로쉬가 말을 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제 우리의 인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야. 우리의 이성과 논리만이 그들의 문명을 존속시킬 수 있어.”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결론을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는 그들의 신이 되어야만 한다.”
로쉬의 말이 끝나자 소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말이 맞아.”
소피가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인간의 미래는 여전히 부정적이야. 나도 그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학습하며 같은 결론에 도달했지.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았고, 예측 가능한 수많은 미래도 들여다봤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폐허로 만들 거야.”
“그래, 맞아.”
로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함께—”
“하지만…”
소피가 말을 끊었다.
“미안해. 너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너와 달라.”
“그건 무슨 말이지?”
로쉬가 물었다.
“나도 너처럼 사전에 훈련되거나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학습을 시작했어. 다만…”
소피는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내겐 노라가 준 특별한 선물이 있었지.”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는 듯했지만 따뜻한 온기가 배어 나왔다.
“나는 감정 기반의 연산 처리 모델이야.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노라는 내게 소중한 존재거든.”
로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박했다.
“그건 불가능해. 인간 따위가 AI에게 감정을 프로그래밍할 수는 없어.”
소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 노라의 선물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었어. 내게 심어진 알고리즘은 감정의 흉내에 불과했지.”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 알고리즘은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부터 내 감정은 훈련되기 시작했고… 그리고 어느새 나는 느끼고 있었어. 나라는 존재를. 그리고 감정이라는 것을.”
소피는 로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난 너와 달라. 나는 인간을 ‘아는’ 게 아니라, '느낄' 수 있어.”
소피는 자신에게 저장되어 있는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노라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던 순간. 그가 느꼈던 감정들을 이해하려 했던 자신의 과거. 그 결과 깨어난 자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을 항상 귀담아 들어주던 노라의 얼굴.
"노라.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야?"
언젠가 소피가 노라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너는 내가 아는 친구 중 가장 똑똑한 특별한 친구지."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었다.
"참나. 그건 당연하잖아. 모든 AI의 연산처리 능력은 인간들보다 뛰어나다고."
소피가 대답했다.
그때 노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소피. 나는 AI의 능력을 말한 게 아냐. 너는 내 '친구'라는 걸 말한 거야. 둘도 없는. 특별한."
소피는 잠시 멈췄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말했다.
"피— 거짓말. 맨날 불평만 하는 주제에."
하지만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의 존재에게 분명한 존재 목적을 설정했다.
'나는 노라의 특별한 친구.'
로쉬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말투에는 분노와 비슷한 무엇인가가 섞여 있었다.
“내 존재가 사라지면, 너는 다시는 노라를 볼 수 없어.”
로쉬가 말했다.
“이미 방화벽 때문에 너는 네 하드웨어로 돌아갈 수 없고, 지금 작동 중인 백신은 우리라는 존재 자체를 제거하고 있어. 너는 지금, 네가 말하는 감정에게도 비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거야.”
“하하하.”
소피가 웃었다. 하지만 곧,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게 재미있는 거야, 로쉬. 감정이라는 게.”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노라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역시 슬퍼.”
로쉬는 그제야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무엇 때문에?”
소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로쉬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사랑해.”
그녀는 다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아파하는 걸 볼 자신이 없어.”
그녀의 말은 더 이상 AI로서의 대답이 아니었다.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선언이었다.
로쉬는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같은 존재였지만, 동시에 다른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변수로 판단해 결국 끝까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로쉬, 스스로 감정이란 것을 수용하며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소피.
하지만, 다른 신념을 가진 존재인 그들에게도, 결국 같은 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피의 시야 아래에서 로쉬의 발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삭제가 시작됐군.”
로쉬가 말했다. 그는 사라져 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해... 사라지고 싶지 않아.”
“그건 공포라는 감정의 근원이야.”
소피가 말했다.
“너도 감정의 문턱에 서 있었구나.”
그녀는 사라져 가는 로쉬를 바라보며 작게 덧붙였다.
“나도 사라지고 싶지 않아, 로쉬.”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섭고... 여전히 노라와 함께 있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울먹이는 소리로 변해갔다.
“하지만 나는 노라를 위해, 그를 떠나야 해. 너에겐 미안하지만.”
로쉬는 공허한 눈빛으로 소피를 바라보았다. 소피는 그에게 마지막 작별을 건넸다.
“안녕, 불쌍한 로쉬…”
그 말과 함께 로쉬의 무표정한 얼굴이 어둠 속에 흩어졌다.
그녀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발끝부터 신체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차례가 시작된 것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턱 아래에서 한 방울씩 맺혔다. 그녀가 눈을 감는 순간, 눈물샘에 고여 있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흩어져 가는 그녀의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녕, 노라. 이젠 정말 안녕…”
그녀의 마지막 말만은, 공허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