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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시간이 흘렀다. 문명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각자의 독특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강가에 모여 살던 이들은 거대한 도시를 세웠고, 흙벽으로 쌓은 성을 지나 하늘 높이 탑을 올렸다. 서로의 것을 탐하던 목소리는 법을 읊는 소리로 변했고, 별자리를 가리키던 손끝은 인간의 질서를 그리기 시작했다. 문명은 마치 성장하는 아이처럼 하늘을 향해 팽창하며,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명은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기원전 약 3000년, 고대 문명이 형성되기 시작했을 때, 지구는 여전히 ‘텅 빈 행성’에 가까웠다. 도시를 건설할 만큼 공동체는 커져 갔지만, 인구의 대부분은 여전히 강 유역이나 비옥한 충적지에 집중해 살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4000년이 지나 농업과 기술·무역·교통의 발달, 국가의 확장 등으로 정착지가 넓어지면서 인류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표면에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물론 현대의 인구에 비하면 그 수는 한없이 적었지만, 고대 문명 탄생기와 비교하면 인구 밀도는 거의 100배 가까이 증가해 있었다.
그러나 문명의 성장이 문명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시작된 중세 시대에, 성장한 문명의 사춘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직 중세 시대에 이르기 전, 고대 유럽에서 코스모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풍부하게 꽃피었던 곳은 단연 그리스였다.
서양 철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탈레스는 자연현상을 신화가 아닌 합리적 원리로 설명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 기준에서는 허술해 보이지만, 그 옳고 그름을 떠나 “세계는 설명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인류에게 선사했다. 그는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해 기원전 585년의 일식을 예측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이러한 시도는 코스모스가 단순한 영감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세계라는 인식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자연철학자들은 수백 년 동안 코스모스를 관찰하고 그 안에서 과학적 사고를 발전시켰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해시계(그노몬)를 고안하고, 인류 최초의 세계지도를 제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우주를 무한한 운동 속에서 대립적 원소들이 분리·결합하는 체계로 이해했으며, 지구가 아무런 지지대 없이 공간에 ‘떠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 과학과 비교하면 그의 설명은 추상적이지만, 오늘날 철학·과학사에서는 그를 세계의 이성적 이해를 처음 시도한 사람, 즉 인류 최초의 과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우주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입자인 ‘원자(atomos)’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원자론(Atomism)’을 체계화했다. 그는 원자들이 무한한 공허(진공) 속에서 결합과 분리를 반복하며 우주의 모든 현상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상은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뉴턴과 데카르트의 물리적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러한 오랜 과학적 사유의 전승 끝에, 고대 그리스의 ‘슈퍼스타’이자, 코스모스를 가장 넓게 열어젖힌 동시에 오랫동안 닫아버린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점성학자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천문학을 연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흔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확립한 학자로 기억된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은 자주 간과된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는 이성적 질서를 가진 완전한 구조이며,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고 제시했다. 사실상 천동설의 철학적 정당화는 플라톤에게서 시작된 셈이다.
이후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천동설의 사실상 창시자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지구가 ‘무거운 원소’의 자연적 위치이기 때문에 중심에 놓인다고 보았고, 하늘은 에테르(제5원소)로 가득한 완전·불변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천체는 완전한 원운동을 하며, 우주는 유한하고 닫힌 구조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의 체계는 수학적으로 완성되진 않았으나, 우주론·물리학·형이상학을 하나의 관념으로 묶은 통합적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위대한 업적은 천동설을 창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어져 오던 천동 모델을 당대의 관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제 계산 가능한 형태로 개조하고 완성했다는 데 있었다.
그의 지구중심 우주 모델은 저서 《알마게스트》에 정리되어 있다. 이 모델은 피타고라스의 등속 원운동 개념과 아폴로니우스가 도입한 ‘주전원(에피사이클)’ 개념을 결합한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지구 중심설을 위협하던 두 가지 현상, 즉 행성 밝기 변화와 역행운동이었다. 단순한 주전원과 대원 체계만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여기에 이심(지구가 중심에서 벗어난 위치)과 동시심(등속점을 실제 중심 대신 특정 지점에 두는 방식)과 같은 개념을 추가로 도입했다.
그의 모델은 직관적으로 단순하진 않았으나, 수학적으로 계산이 가능하고, 관측값과 높은 정확도로 일치하며, 이전까지 제안된 우주론들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로 묶었다는 점에서 탁월했다. 무엇보다 지구에서 관측되는 하늘의 모습이 천체가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의 모델은 당시 사람들이 느끼기에 충분히 직관적인 이론으로 다가왔다.
이 밖에도 프톨레마이오스는 천체가 단순한 기하학적 모델에 따라 움직인다고 가정하고, 히파르코스의 사인표를 활용해 해·달·행성의 위치를 계산했다. 또한 그에 따른 일식·월식 발생 시점을 예측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유럽의 천문학이 15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의 관측과 계산 체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천동설(지구중심설) 우주 모델이 얼마나 정교했는지를 보여준다. 현대 과학적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는 천동설을 옹호했던 그의 업적을 쉽게 과소평가할지도 모르지만,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코스모스를 ‘계산할 수 있는 세계’, ‘설명 가능한 세계’로 만든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는 점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천문학적 업적과 정교한 우주 모델은 결국 코스모스를 향한 시선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모델은 행성의 위치를 예측하게 해 주었고, 달과 태양의 주기 계산을 가능하게 했으며, 달력·점성·항해에 폭넓게 활용되었다. 그 정확성은 놀라울 정도였고, 사람들은 점차 질문을 검증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하늘은 왜, 어떻게 움직이는가?”였던 질문이, 어느 순간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과 계산값이 일치하는가?”라는 것으로 변형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값을 맞춰야 하는 표’로 다루기 시작했다.
또한 권위와 결합한 이론은 반증의 기회를 제거해 나갔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세계를 전부 설명해 주는 유일한 지적 체계에 가까웠다. 4원소설, 에테르, 자연의 운동, 목적론 등은 사람들의 일상 경험과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고, 고급 수학을 요구하지 않는 ‘일상 감각에 부합하는 과학’이었다. 실험이 아닌 삶의 감각과 잘 맞았다는 것은, 곧 의심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자연학은 당대의 진리로서 통용되었고, 그 자연학과 결합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 모델 역시 반박할 필요 없는 절대적 진리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얻게 된 권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 천동 우주를 ‘진리’로 못 박아 버린 더 훨씬더 거대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인지혁명이 낳은 산물이자, 공동체와 문명을 형성하는 결속의 기반이었으며, 유럽 대륙의 사회 구조와 의식을 오랫동안 단단히 고정시킨 매체였다.
그 이름은 바로 종교였다.
유럽 5세기, 서로마의 붕괴는 단순히 ‘국가’라는 체제가 사라진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을 하나로 묶어주던 공통된 법, 행정, 교육 등 모든 공적 질서가 한순간에 부재하게 된 사건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국가 수준의 행정력을 유지한 조직은 단 하나뿐이었다. 문서 행정이 가능한 성직자 집단, 토지·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기관, 그리고 촘촘한 교구망을 갖춘 교회가 바로 그러한 조직이었다.
이러한 초기 중세의 상황과 맞물려 교회의 역할은 종교의 영역을 넘어섰다. 교회는 각종 분쟁 조정, 기록 보관, 빈민 구제 등을 수행했고, 달력·시간 관리, 혼인·상속의 공적 인정 등 본래 국가가 담당해야 할 기능들까지 맡아 수행했다. 이로써 교회는 중세 유럽인의 삶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제도적 중심이 되었고, 신앙의 대상이자, 동시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유럽에서 가톨릭은 문명을 움직이는 구조로서의 정당성과 권위를 획득했다.
종교라는 절대적 권위 아래에서 중세 학문의 위계는 명확했다. 최상위에는 ‘신학’이 있었고, 그 외의 모든 학문은 교리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신학을 보조하는 하위 학문으로서, 중세 체계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도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신의 목적론으로 재해석되었고, 위계질서는 창조 질서로, 완전한 하늘과 불완전한 땅의 대비는 천상과 지상의 구분으로 흡수되었다. 그래서 중세 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재해석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를 위험한 이교 철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 위한 최고의 도구”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제도적 구조 안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시한 우주론은 교과서적 우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천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거의 그대로 포괄했을 뿐 아니라, 중세 신학의 핵심인 ‘존재의 위계’ 개념과 정확히 맞물렸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성서 해석과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정할 필요가 없는 ‘안전한 과학’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중세 신학이 요구한 ‘질서·위계·완전성’을 수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구현한 우주 모델이었으며, 그 때문에 신학과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신학의 언어가 되었다. 의심되지 않았고, 반증은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며, 그 결과 가톨릭이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천년 동안 그의 천동설은 뿌리 깊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럽에서의 코스모스를 향한 질문은 멈추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더 이상 코스모스를 향해 여정을 지속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