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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벽과 교회의 첨탑은 하늘을 향한 시야를 가렸고, 진리를 묻는 입은 ‘이단’이라는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자연은 신의 뜻이 담긴 책 속 문장이 되었으며, 그 책을 읽는 자만이 ‘그들 스스로 정한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교회와 왕권을 위한 제도는 계층 간 격차를 심화시켰다. 십일조, 면죄부, 세금, 부역 의무는 농민과 도시에 막 진입한 장인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웠고, 그 부담은 문맹과 빈곤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성직자와 귀족이 독점한 라틴어와 법률 지식은 성장 사다리를 끊어 놓았고, 무지는 통치의 편리한 장치가 되었다.
이단 심문과 마녀사냥은 사회의 불만과 공포를 ‘타자화’하여 해소하는 구조로 작동했다. 흑사병이나 기근의 원인은 신앙의 순수성을 의심받는 소수 집단에게 전가되었고, 공동체적 연대는 파편화되었다.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구조는 화합과 공존의 기반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이처럼 중세 유럽의 신정적 정치 구조는 ‘자연-문명, 문명-인간, 인간-자연’의 조화 삼각형을 붕괴시켰다. 인간이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느꼈던 경외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공포와 복종의 서사로 대체되었고, 문명은 본래 모방하고자 했던 우주의 균형으로부터 멀어졌다. 코스모스는 여전히 질서를 따르고 별은 변함없이 떠 있었지만, 그 움직임을 기록하던 이들은 숨죽여야 했다. 자연은 언어가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 질서를 드러냈지만, 그 침묵은 종종 기득권층의 권위를 강화하는 언어로 왜곡되었다.
하늘은 한 번도 인간의 위계나 절대 권위를 상징한 적이 없었다. 모든 천체는 크기와 밝기가 제각각일지라도 서로의 궤도를 침범하지 않았고, 조화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입을 거친 코스모스의 모습은 소수 권력자를 위한 하늘로 재해석되고 전파되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교의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의 지동설은 단순한 천문학 혁신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 질서의 정점’이라는 신학·철학적 전제를 뒤흔든 선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이론이 신-인간-우주로 이어지는 위계 도식을 붕괴시킬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원고는 사후에 가까운 시점까지 묵혀 두었다. 최종 인쇄본의 서문에는 교회 검열관이 삽입한 “가상의 수학적 모형”이라는 완충 문구가 붙었다. 과학적 사유뿐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재해석하려는 철학적 시도마저, 이렇게 인쇄물 안에서부터 봉쇄되어야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과 금성의 위상을 관측하며 지동설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그러나 교회는 그의 주장이 성경의 문자 해석과 충돌한다고 보았고, 그는 1616년 공식 경고를 받은 뒤 1633년 종교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가택 연금되었다.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면은 과학과 신앙의 충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다.
지오르다노 브루노는 우주가 무한하며 다른 별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을 전개했고, 결국 1592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8년의 수감 끝에 1600년 로마에서 화형당했다. 인간과 지구를 신의 유일한 창조물로 여긴 교리와의 정면충돌이었다.
초기 중세 서유럽에서 교회는 자연과학뿐 아니라 그리스 철학 전통도 ‘이교적 지혜’로 경계하며 주변부로 밀어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원전이 수도원에 보존되었지만 실제 교육에서 활용된 것은 6세기 보에티우스가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일부에 그쳤다. 12세기 알안달루스와 시칠리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이 유입되자, 파리 대학은 계시신학과의 충돌을 우려해 한동안 강단에서의 강독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 결과, 고대의 이성 중심 자연 탐구 전통은 오랜 기간 교회 권위 아래 제한적으로만 잠복해 있었다.
그러나 지구는 둥글었고, 진실은 불씨처럼 꺼지지 않았다. 탄압받은 사유들은 언젠가 근대 과학 혁명과 인문주의의 씨앗이 될 것이었다. 다만 그 시기는 아직 먼 미래였다.
한편 동쪽 대륙에서도 자연에 대한 경외는 이어졌지만, 그것이 권위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은 오히려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가 되었다. 천문관이 말하는 하늘의 질서는 곧 권력을 의미했고, 코스모스의 운행과 자연의 이치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권력자의 입에 달려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조상들이 남긴 문명을 보자. 한반도의 왕조 역시 ‘하늘’을 빌려 왕의 권위를 고정했다.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하나가 있었고,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며 하늘로 올라갔다.
(중략)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시키자 몸에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으며,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이에 이름을 혁거세라 하고 왕위의 칭호를 거서간이라 하니, 사람들은 ‘하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왔다’며 그의 배필을 찾자고 했다.”
— 《삼국유사》 신라 건국 신화
혁거세는 사람들에 의해 추대되었다기보다 하늘의 권위를 ‘부여받은’ 왕이었다. 신화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신라가 왕과 귀족의 권위를 초월적·천부적 질서로 고정했다는 점이다. 관념이 만든 허구적 질서였기에 반론이 불가능한 구조였고, 동시에 가장 견고하면서 가장 경직된 체제였다.
그러한 신라의 정치 질서에서 나온 신분제가 바로 ‘골품제(骨品制)’였다. 직역하자면 ‘뼈에도 품질이 있다’는 의미로, 의미만 보아도 현대의 시선에서는 얼마나 부조리한 제도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골품제는 거의 신성 정치(神聖政治)에 가까웠다. 신성한 혈통과 그렇지 않은 혈통이 구분되어 있었고, 왕실과 귀족의 피에는 ‘신성성’이 깃들어 있다는 관념이 핵심 논리였다. 따라서 정치적 권력은 신들의 질서를 대변하는 직무였으며, 혈통이 곧 권위의 근원이 되었다. 왕실을 ‘하늘(天)’과 연결하여 우주적 질서와 결합시키려 했고, 골품은 자연적 질서이자 사회의 근본 구조처럼 여겨졌다. 이를 부정하는 행위는 곧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 노비(奴婢) 제도 역시 혈통 기반 노예 신분의 상속을 제도화했다. 사노비·공노비·솔거노비 등으로 세분화된 이 신분은 인구의 30% 이상을 ‘소유물’로 규정했고,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 되게 했다. 국가 제도 자체가 자국민을 노예화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씁쓸한 역사적 사실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인간관계를 ‘군신·부자·부부·장유·붕우’의 위계 구조에 가두었고, 하늘(天)은 임금과 부친의 권위로 번역되었다. 신분과 권위가 하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고착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평등한 우주의 구성원이 아니라 서열화된 존재로 분류되었다. 땅과 별, 강과 바람 앞에서는 누구나 같은 두려움과 경외를 품었을 인간이, 법전과 호적 앞에서는 ‘양인’과 ‘천인’으로 갈렸다.
결국 거대해진 문명은 모든 인간이 코스모스에서 비롯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했고, 하늘을 닮으려던 조화의 이상은 신분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신분제도, 권위 중심의 국가 운영을 코스모스와 직접 연결지어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제도의 핵심 목적은 커져가는 공동체를 통제하고 질서를 확립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겪는 과도기적 성장통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 정당성을 코스모스에 빗대어 자의적으로 설명하려 했고, 그 정당화 방식이 무엇이든 결국 권력 독점, 사회 경직, 체제 붕괴라는 패턴을 반복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끌어온 코스모스는 결국 실패한 코스모스였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가 가진 ‘완전한 코스모스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양육하며 역할을 나눴던 고대 인류가 이러한 문명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도 폭력·갈등·전쟁은 있었지만, 누군가의 풍요를 위해 누군가를 땅바닥으로 밀어넣는 사고방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질서를 세우고, 공존을 위해 서로 나눴으며, 삶을 위해 코스모스가 상징하는 질서와 조화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갔다.
물론 고대 사회에서도 분명한 위계질서와 신분제도를 통한 계급이 존재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신분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코스모스의 질서를 ‘경청’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권력자가 그 질서를 ‘독점적으로 해석’하며 영구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장치로 변질되었는지에 있다. 초기 문명은 코스모스를 ‘질서의 근거’로 경청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 성숙해진 문명은 코스모스를 ‘권위 정당화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렇게 문명과 인류는 더 이상 코스모스를 ‘경청’하지 않았다. 코스모스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잘못된 도구로 사용하며, 때로는 침묵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문명이 나아간 방향은 코스모스의 조화를 닮아가는 길이 아니라, 점점 더 소수의 기득권층과 권력자만을 위한 구조로 굳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태양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던 행성들을 하나씩 밀어내는 장면과도 같았다. 하지만 행성이 없는 태양을 과연 태양계라 부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문명의 구성원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사회를 과연 문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시기의 문명은 그러했다. 이름만 문명이었을 뿐, 그 안의 코스모스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권위라는 이름 아래 잃어버린 질서와 조화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고, 인류에게 과학 혁명과 인문주의라는 새로운 전환점이 도래했다. 그리고 문명은 다시 코스모스를 마주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처럼 하늘을 닮으려는 시선이 아니었다.
문명은 코스모스를 회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인류는 긴 밤을 지나 새로운 아침을 맞았지만, 그 아침에 바라본 자연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그 새로운 시선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