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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선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고대의 철학자들은 코스모스의 원리를 탐구했다. 그리고 그 탐구는 결국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이어졌다. 한편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은 윤리라는 형태로 발전했다.
칸트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바라보며, 우리가 스스로 세운 보편적인 도덕 법칙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고, 그 행위를 보편적인 원칙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러한 윤리에 대한 고찰을 담은 철학이라는 학문은 여전히 우리의 삶과 관계가 없고 멀리만 있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의견은 평범한 일반인 뿐만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도 공감하고 있는 인식이기도 하다.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철학 무용론’을 주장하며 “철학은 죽었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미국의 정치 평론가 벤 샤피로는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 과목은 좌편향된 사상만을 심어줄 뿐이며, 생산성이나 실용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철학이 답을 얻고자 하는 존재론적 질문들을 오히려 과학이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고, 철학이라는 학문이 실용성과 효율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가치판단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구는 방향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법이다.
오늘날 과학이 가진 능력은 분명히 놀랍지만, 그 도구를 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기 충분한 능력이 되는지 점검해볼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면 철학이 우리를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이끄는지 그 가치를 먼저 설득시켜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번에 풀어나갈 이야기의 방향은 ‘인간이라는 종(인류)’이 아니라 ‘개개인의 인간’, 다시 말해 당신을 향해 있다.
그 이야기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철학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는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철학자는,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오랜 시간 동안 서구인의 의식을 지배해 왔고, 그 세계 속에서 형성된 도덕 관념 역시 기독교적 교리 안에서 점차 고착되어 갔다.
이단 심문이나 마녀사냥과 같은 극단적인 선악 구분의 사례들이 있었지만, 기독교적 도덕 관념이 반드시 문제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사랑, 용서, 관용, 신뢰와 같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선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이 기독교 교리 속에서 권고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뿌리내린 도덕적 개념들은 오랫동안 그 가치 자체가 거의 의심받지 않은 채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 철학자가 그 도덕과 가치의 기반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이 가치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 질문을 던진 인물이 바로 니체였다.
니체는 서구 문명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의심했다. 선과 악, 도덕과 죄, 겸손과 희생과 같은 가치들이 정말로 보편적인 진리인지, 아니면 특정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질문한 것이다.
그는 당대 사람들이 믿고 있던 도덕적 관념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약자와 고통, 겸손과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가치 체계에 점차 회의감을 품기 시작했다. 니체의 눈에는 그것이 힘과 생명력을 긍정하는 윤리가 아니라, 강한 것을 억누르고 약한 것을 미화하는 윤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덕은 약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하게 만들었으며, 기존의 관습과 평판에 복종하는 태도를 강화한다고 그는 보았다.
즉, 니체가 보기엔 힘이나 권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겸손과 순종을 선으로 여기는 서구적 윤리관은 결국 약자들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도덕이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가치 체계를 ‘노예 도덕(slave morality)’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도덕적 가치는 진정한 윤리 판단이 아니라 심리적 판단에 불과하다 규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선으로 만들고, 그들의 두려움을 겸손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복수하지 못함은 복수하고 싶지 않음이라고 불린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계보》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서구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선언하게 된다.
“신은 죽었다.”
니체가 남긴 가장 유명한 문장이다.
그러나 니체가 이 문장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였다.
앞서 언급했듯, 니체는 이전 시대로부터 규정되어 온 모든 도덕적 가치들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가졌다.
신의 명령과 종교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던 서구 문명의 도덕적 가치는, 과학과 이성의 발전 속에서 점차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지는 절대적 가치에 의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니체는 가장 높은 가치들이 그 의미를 잃어버린 이러한 상태를 ‘허무주의(Nihilism)’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것이 곧 신의 존재 유무나 도덕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기독교 세계는 ‘진리’를 향한 강한 집착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적 진리는 ‘신의 질서’였다. 그러나 과학은 그 진리를 ‘자연의 질서’로 전환시켰다.
결국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정신이 역설적으로 신의 세계를 흔드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즉 “진리를 추구하라”는 기독교의 명령이 과학과 비판적 사유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 속에서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물론 유럽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진 이유를 이러한 하나의 흐름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다.)
니체는 신이 더 이상 인간 삶의 중심적 의미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전 시대에서 신은 진리의 근거이자 도덕의 근원이었고, 나아가 삶의 의미 자체였다. 그러나 신의 세계가 무너진다는 것은 절대적 기준의 상실을 의미하며, 선과 악의 근거 또한 함께 흔들린다는 것을 뜻한다.
이 지점에서 니체가 가장 심각하게 본 문제는 바로 ‘허무주의(Nihilism)’였다. 여기서 말하는 허무주의는 단순히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겨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