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를 굽는 가마에서 하나의 그릇이 탄생하는 전 과정을 지켜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 이 글은 그 수고로움과 불의 신비가 깃든 장작가마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록이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작가님의 가마는 늘 불로 뜨겁다. 하나의 다호가 만들어지기까지 천 번의 손길을 빠르고 가벼우면서도 경쾌하게 표현하는 그의 작업을 지켜보는 일은 늘 즐거웠다.
그는 6칸 너구리 가마를 황토와 벽돌로 직접 짓는다. 불길이 지나치게 세어 도자기를 태워버리던 시절, 그는 자신의 호(號)마저 바꾸었다. 그렇게 뜨거운 시간을 지나, 오늘도 그는 가마 앞에 앉아 그릇의 굽을 깎고, 흙을 만진다.
가마를 짓는 일은 집 한 채를 짓는 것만큼 어렵다. 집에 구들을 놓을 때 고래를 잘 놓아야 고루 방이 따뜻하고 온기를 빼앗기지 않듯이, 가마를 만드는 일은 흙과 나무와 불의 어디쯤에 불길이 감길지 빠져나갈지를 직감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는 공학적으로 설계하여 지을 수 없는데 불이 미치는 상관은 너무도 복잡하고 예민하기 때문이다.
불을 때면 고온에 흙이 터지고 재가 튀어 고스란히 그릇이 뒤집어쓴다. 사람들은 흠결 없는 가스 가마나 기름 가마의 물건을 좋아하겠지만, 나는 텁텁한 너구리 가마 속에서 불길의 춤이 만들어 낸 장작가마의 그릇을 더 좋아한다.
가난한 도공은 흙을 살 수 없어서 괭이를 들고 나선다. 산에는 고슬고슬한 산의 흙이 있다. 맛을 보고 색을 보며 한 삼태기를 퍼 온다. 흙은 그대로 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야생의 흙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는 방앗간에서 쌀을 빻듯이 흙을 고루 빻고 체 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 흙에 물을 넣어 반죽을 하는데 예전에는 땅바닥에 놓고 발로 치댔다. 지금은 흙을 만드는 기계가 있어서 그 수고가 덜하다.
반죽 흙은 가래떡이 뽑혀 나오듯 그렇게 둥근 기둥 모양으로 세상에 온다. 반죽된 흙은 이제 도공의 손을 기다린다. 언젠가 누군가의 부엌이나 다실에서, 사랑하고 지지고 볶는 일상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친 것이다.
흙이 만들어지고 나면 물레를 돌린다. 원하는 양만큼 흙을 떼어 물레를 돌리면서 성형을 한다. 성형은 흙과 도공의 호흡, 손의 근육과 섬세함으로 결정된다. 물레의 리듬 없이 손으로만 빚은 그릇은 투박한 맛은 있어도 물레의 운동성이 깃들지 않아 유려함이 덜 하다.
성형이 완료된 그릇은 건조의 과정을 거치고 유약을 입히는데, 그릇 밑바닥에 이름을 새기고자 하면 이때 초 칠을 해둔다. 유약은 바른다고 하지 않고 입힌다고 하는데, 유약 작업은 그릇에 화장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같은 모양새의 그릇이라도 유약은 그릇의 이름과 색, 그리고 운명마저 결정하는 힘이 있다. 유약은 그 종류가 다양해서 여기서는 다 쓰지 않는다.
돌을 가루 내어 물에 풀고 미숫가루를 휘젓듯이 저어둔다. 커다란 고무통에 담긴 유약 물에 그릇을 담그고 휘리릭 돌려서 꺼낸다. 여기서 유약 수에 오래 그릇이 머무르면 그 양이 많아져 유약이 뭉친다. 그릇의 두께가 그러하듯 유약의 발림도 일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흙에 돌가루가 스며들지 못하고 흘러내리거나 터져버린다.
나는 이 작업을 지루한 줄도 모른 채 내내 지켜본다. 작은 다호부터 상당한 크기의 항아리까지 단숨에 유약을 감아내는 순간은 도자기와 도공이 한 호흡으로 작용한다. 물성만을 지닌 그릇이 인간의 영성을 만나 일체가 되는 순간인 것만 같다.
유약 작업이 끝나면 가마 안에 그릇을 차곡차곡 쌓는다. 재가 최소한으로 튀도록 칸막이도 설치한다. 불은 1박 2일간 밤잠을 설쳐가며 땐다. 불을 때는 자는 몸의 묵은 때와 땀을 씻어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간단한 다례를 행한다.
불을 땔 때 장작이 타닥타닥 내는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을 보면, 내가 은하수 어디쯤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는 캄캄한 밤의 영역으로 흘러든 가마의 연기가 만들어낸 환상 같은 것이기도 하고, 막걸리의 취기에 조울 해진 나의 감성 때문이기도 하다.
불을 때는 밤, 나는 불길을 뺀 모든 것이 흑백 세상의 여백으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태생이 땅의 것인 그 무언가가 불길을 얻어 타고 하늘, 내가 갈 수 없는 그 먼 곳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이 작용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긴다. 이 환영 같은 신비는 밤새 세상에 그득하다가 새벽이 오면 마침내 사라진다.
불을 통해 죽고 다시 태어나는 흙의 이야기는 여전히 신화의 몫이다. 나는 그릇이 만들어지는 순서나 원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그릇이 빛을 보기까지의 수고로움과 여전히 신화적 요소가 있는 불 때는 작업의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한다.
가마에서 잘 익은 그릇을 꺼낼 때 티끌 많은 못난 것에 마음이 간다. 재의 파편이 불의 열기에 녹아 애초부터 흙의 것인 양 자연스러운 그것은 생활의 그릇이 될 것이다. 티끌 한 점 없고 뒤틀림 없는 도자기는 삶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호가의 장식장에 과잉 비호를 받으며 그저 위치할 것이다.
나는 삶의 모습을 닮은 흠결 많은 그릇에 마음을 준다. 장식장 속 고가의 항아리보다, 밥과 차를 담아낼 생활의 그릇을, 나는 여전히 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