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초고를 책임지는 사람

- "초고는 쓰레기다" 헤밍웨이~ 고마워!

by 이채이

초고란, 글이 아니라 흔적이다. 샤워 후 속옷만 입고 거실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본다. 그 상태로 문밖을 나설 수는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처음부터 완벽한 것을 내놓는 일이 아니라 불완전한 생각을 일단 꺼내놓는 일이다. 작가는 먼저 자신 앞에 자신을 꺼내놓는다. 그것이 초고다.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헤밍웨이의 말은, 매일 쓰레기만 잔뜩 생산하고 자책하는 내게 위로가 된다.


속옷 위로 셔츠를 걸치고 바지를 챙긴다. 머리를 손질하고, 스카프를 매고, 양말과 구두를 고른다. 거울 앞에 선다. 전체를 본다. 어딘가 어색하다. 단추를 다시 잠그고, 향수를 뿌리고, 가방을 든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의식이다. 외출을 위한 준비이자, 글을 완성해가는 과정과도 같다. 잘 다듬어진 글이란 단순히 문장이 매끄러운 것을 넘어, 맵시 있는 차림처럼 멋이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것이다.


문장은 곧 나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꿰매고 다듬는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코코샤넬처럼 초고는 쓰레기라 말하는 헤밍웨이처럼. 벌거벗은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되, 그 마음이 덜 부끄럽게 보이도록 조율한다.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드러내는 일이 아니다. 세상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설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작가는 잠옷 차림으로 세상에 나서지 않는다.


이제 나는 안다. 초고는 시작일 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시작을 끝까지 이끌어가는 일이다. 속옷 차림의 글에 옷을 입히고, 빗질하고, 멋을 더해 거리로 당당히 나서게 하는 일. 단지 생각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생각의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작가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