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은 천이 아름다운 곳이다. 양산은 통도사가 유명하지만 나는 통도사 곁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그 안을 채우는 물의 생명을 귀히 여긴다. 상류의 물은 거칠게 흐르면서 내에 잔돌을 남기지 않는다. 물결의 힘으로 해볼 수 없는 커다란 바위만을 남기고 모조리 긁어서 하류에 버린다.
양산천은 달리고 달려서 사람 사는 동네까지 내려오는데, 그곳에 이르면 물살은 호흡을 되찾고 숨 가쁘지 않다. 자잘한 바위들이 내를 듬성듬성 채우고 그것을 들추면 다닥다닥 다슬기가 산다. 다슬기는 사람들 곁에서 살고 번성한다.
하류에 이르면 천의 폭이 넓어지는데 이곳에 도시가 형성되고 물류창고가 들어섰다. 물은 고요히 흘러서 상류와 하류의 방향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잔해진다. 어떤 날은 남에서 북으로 물이 흐르는 듯싶다가, 또 어떤 날은 북에서 남으로 밀려가는 듯도 싶다가 어떤 날은 고정된 채 꼼짝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물의 흐름을 주관하는 것이 물이 아니듯이, 잔잔하고 평평한 곳에서는 바람이 주인 노릇을 하는 듯싶다. 바람은 하늘의 높은 층위에 머물지 않고 허공을 건너오면서 물의 표면을 스치고 결을 만든다. 그 바람의 결을 따라 물은 좌로도 우로도 상으로도 하로도 흐르는 듯 보인다. 인간의 눈은 착시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양산천을 따라 닦여진 길을 걷다 보면, 천의 양쪽에 어림잡아 십여 종의 새가 모여서 노는 걸 본다. 하류의 모래톱에는 오리 떼가 모여 있다. 머리통이 초록색인 놈들과 갈색인 놈들이 섞여서 논다. 새들은 어울려 놀면서도 제 무리를 유지하며 내외하는데, 그들만의 거리를 두고 홀로인 것도 있다. 겨울이면 원앙이 찾아온다. 오색으로 알록달록한 원앙은 이곳에서 더는 춥고 발이 시리지 않다. 원앙 암수는 둥지를 틀고 짝짓기를 할 것이다.
긴 목을 가진 백로는 건들건들 물 위를 걷는다. 물에 발을 담그고 먼 산을 보기도 한다. 대게 한두 마리씩 짝지어 다니지만 가끔은 무리를 이루며 순백의 역동성을 뽐낸다. 백로가 홀로 물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면, 물속의 제모습을 통해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백로는 명상을 배우지 않았지만 스스로 침잠하고 인내하고 고요할 줄 안다.
천은 안과 밖으로 무수한 생명을 품고 있다. 물속에는 저녁이면 튀어 오르는 물고기가 산다. 바람이 잠잠하고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 시간이 오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고기들이 산소를 마시러 얼굴을 내민다고도 하고 저들끼리 그저 노는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물고기가 되지 못한 인간은 그들의 사생활과 소망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렵다. 그저 부레 없이 살 수 없는 운명을 거부하며 시공 속으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해 질 녘의 붉어진 물빛 속에서 점프하는 물고기를 보면, 나는 고대의 전설을 떠올린다.
북해의 곤(鯤)이 삼천리 파도를 만나서 구만리장천을 날아오르고 거대한 붕(鵬)이 되는 상상을 한다. 작은 알에서 시작된 곤(鯤)이 구만리장천을 나는 새가 되는 꿈을, 한 번의 날갯짓으로 여섯 달을 날아가는 그런 허황된 꿈을 꾼다.
나는 물속 생명이 가진 유전자에도 붕(鵬)이 되고 싶은 꿈이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오래오래 보존되었고 전수되었을 터이다. 물고기 한 마리가 거대한 새가 되는 전설을, 뻐끔거리는 입을 통해 꺄~하고 긴 소리를 내는 추억을, 화석처럼 굳게 새겨진 그들의 오도 가도 못할 삶의 역설을 그들이 기억해 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도, 바람도, 새도, 물고기도, 그리고 나 역시 흐름과 멈춤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멈춤은 끝이 아니고, 흐름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물결 속에서, 날아오를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sbeomlee 님에게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