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오래된 기억

by 이채이

겨울의 이른 아침. 왜 옆집에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선명한 것은 옆집 아래채의 장작불이 맞춤하게 사그라들어 화끈거리는 불덩이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커다란 무쇠솥에는 소죽이 끓고 있었고, 비스듬히 열린 솥뚜껑 사이로 구수한 김과 달달한 풀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죽이 끓는 겨울 아침의 냄새는 다복한 농경사회의 풍경으로 수렴하는 그리움이 배어있다. 냄새를 맡은 소는 연신 침을 흘리며 '음머~음머~' 콧김을 뿜었다.


친구 '정이'와 나는 아궁이 곁불을 쬐며 숯이 되어가는 불덩이를 뒤적거렸다. 불 속은 아직 너무 뜨거워서 어린 우리가 고구마나 군밤을 묻을 수 없었다. 숯불 위에 얹은 밤이 칼끝으로 낸 결을 따라 벌어지면, 할머니는 군밤을 까주시고 했다.


어린 우리는 부삽으로 숯불을 떠 나무로 둘러친 울타리의 개구멍에 불을 놓았다. 불의 씨앗은 연기를 뿜으며 고요히 하늘로 올라갔다. 우리는 손뼉을 치며 성공적인 불놀이에 고무되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우리가 알밤을 들고 돌아왔을 때, 불길은 이미 번지고 있었다. 울타리를 태우고 건너편 헛간 지붕으로 옮겨붙으려는 순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몰려들었고, 냇가에서 얼음을 깨고 물을 퍼 나르며 양동이로 척척 뿌려댔다. 헛간 지붕 절반을 태우고 가까스로 진화되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집으로 달려와 아랫목 이불 속에 숨었다. 이불굴 속에서도 비명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떨리는 내 몸이 먼저 말해주고 있었다. 내 속에서 불은 뜨겁게 번지고 있었고 불안한 마음은 방향을 잃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두려움에 울던 나는 혼절했다.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다.


세월이 흘러 처음 시골 학교에 갔을 때, 동식이라는 아이가 특별 관리를 받고있었다. 동식이는 4학년이었지만 열세 살 이었고, 지능은 수준 미달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의 배에 불을 질러서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동식이는 기피 대상 1호 학생이었으며 학교에서도 자주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수업 중 찾아간 화장실에서는 남성용 소변기의 센서를 망가뜨렸고, 보건실에서는 슬그머니 티브이 전선을 가위로 자랐다.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해 별 반응이 없으면, 견디지 못한 그는 “티브이 틀어 달라”거나 “소변기가 이상하다”라고 말하며 관심을 끌었다. 동식이는 웃었고, 우리는 한숨을 쉬었고, 교장과 교감은 길길이 날뛰었다. 동식이가 학교 뒤편 소각장에서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논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교감과 행정실 주사들이 득달같이 달려갔다. 동식이는 자주 웃었다.


학교에 불려온 동식이 엄마는 앙상한 섬유질 같은 손으로 빌었다.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나무 껍데기 같은 메마른 손을 비벼댔다. 나는 동식이 엄마가 마찰로 불을 만드는 상상을 했다. 동식이의 불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제 어미의 손에서 얻어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들은 라이터로 여기저기 불을 놓는 동식이를 방화범이라고, "천하에 몹쓸 병신 새끼"라고 경멸하며 분노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를 쉽게 욕할 수 없었다. 내 안에 겨울 아침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침 화재를 두고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았다. 나는 용서 받았던 것이다. 나의 혼절이 사건을 왜곡시키고 기억을 단절한 것인지 몰라도, 그날은 일은 뿌옇고 비논리적이며 몽롱하기만 하다.


시골집 아궁이에 불을 지펴 불멍을 할 때면, 40년도 더 넘은 그 날의 일이 떠오른다. 불의 기억은 세월의 벌어진 틈새로 삐져나온다. 모든 기억이 시간의 계획 속에서 찌꺼기로 버려진다 해도, 누구에게나 마지막까지 남는 몇 개의 선명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퇴적된 시간의 양만큼 기억은 곰삭아서, 이제 겨우 원줄기만 남았다.


새로운 시간은 과거의 것을 불러내서 망각으로 덮어버린다. 특정 기억은 냇물처럼 꽁꽁 얼어붙어, 한 통의 필름에 갇힌 채 통째로 사라졌다. 불운이 떠나버린 시간 안에서 나는 평화롭게 내일을 기다린다. 어른이 된 동식이도 지금쯤 환하게 웃으며 기억 저편을 느릿하게 거닐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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